국민의 국민에 국민을 위한

1. 세 명의 대통령과 세종시

2007년 7월 20일 오전 10시, 노무현 대통령은 세종시 기공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대전 리베라 호텔로 이동하여 각 지자체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오찬을 나누었다.

식사 전 마이크를 잡은 노 대통령은 연설 도중 대뜸 사연 하나를 꺼냈다.

"저는 박정희 정권에 계속 반대해왔던 사람입니다. 특히 유신헌법 직전에,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선거가 있었는데 공개투표에서 반대 투표했다가 기합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기에 이루어졌던 많은 발전, 내지는 오늘날 발전의 토대가 되었던 그 분의 업적을 다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서 우리 정부가 하고 있는 일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계획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이 사업입니다. 1970년대 후반에 계획하고 입안했던 것을 이제 와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행정도시에 관한 한 박정희 정부의 업적을 제가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느낌이 좀 묘하죠.

그때 이 사업이 진작 이루어졌더라면 오늘 한국이 좀 더 다른 모습 아니었겠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밥상 자리에서 긴 말은 늘어놓지 않겠다던 노무현 댜통령의 연설은 20분이나 이어졌다.

세종시가 맺어준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시작된 화제는 "세종시는 균형발전과 국민통합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결론으로 마무리 되었다.

부드러웠던 노무현 대통령의 눈빛과 음성은 어느새 단단해져 있었다.

이날 오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언급한 박정희 대통령의 계승 사업이란 세종시 건설이었다.

이 정책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때는 2001년 9월 말.

제16대 대통령 출마를 준비하던 무렵이었다.

당시 노무현 후보는 경선 캠프의 정책팅장으로부터 A4 3장짜리 제안서를 건네 받았다.

그 내용은 '호남' 기반의 정당에서 대통령에 도전하는 '영남' 출신의 후보로서 통합과 개혁이라는 국가 비전을 실현하고 지방분권자치를 이루려면 '충청권'을 아울러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충청지역에 행정수도를 건설하는 정책공약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20여 년 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박정희 대통령의 '임시행정수도 백지계획'이 새롭게 떠올랐다.

그러나 행정수도에 관한 최초의 구상은 백지계획이 아니었다.그보다 먼저1971년 4월, 제6대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 후보가 행정수도건설을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박정희 정권이 안보를 떠들면서 한강 북쪽에 600~700만명의 인구를 밀집시켜 놓은 것은 스스로 안보 위기를 조성하는 행위라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내가 집권하면 대전을 행정 부수도로 만들어 1단계로 정부 각부의 외청을 옮기고, 2단계로 행정부의 일부를 순차적으로 이전 시키겠다.

이와 함께 장항을 관문으로 대전~경북~강원도를 잇는 횡단고속도로를 급속히 건설, 전국을 반일(半日) 행정 및 반일 생활권으로 묶겠다.

대전을 비롯한 부수도로 하겠다는 것은 내가 69년에 대전서 이미 발표한 것으로 안보, 균형 있는 국토개발, 인구 분산을 위해서 불가피한 것이다."

김대중 후보는 전 국민의 45퍼센트 지지를 받았으나 대선에 패배했다.

그러나 3선 개헌을 이루고 장기집권 체제에 돌입한 박정희 대통령 역시 서울의 과밀화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카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77년 2월, 임시행정수도건설을 국민 앞에 공식 선언했다.

감대중, 박정희, 노무현이라는 세 명의 대통령을 행정수도에 집중케 한 극본적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에는 격동하던 1960년대 수도 서울의 변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서울은 넓다. 아홉 개의 구(區)에 가(街), 동(洞)이 대충잡아서 삼백팔십만이나 된다.

청량리 너머로 망우리, 동북쪽으로는 의정부를 바로 지척에 둔 우이동, 서북쪽으로는 인천가도 중간의 영등포 끝, 동남쪽으로는 한강 건너의 천호동 너머, 서남쪽으로도 시흥까지, 이렇게 굉장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넓은 서울도 삼백팔십만이 정작 살아보면 여간 좁은 곳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꽉꽉 차있다.

집은 교외에 자꾸 늘어서지만 연년이 자꾸 모자란다.

일자리는 없고 사람은 입만 까지고 약아지고 당국은 욕사발이나 먹으면 낑낑거리고 신문들은 고래고래 소리나 지른다."

1966년 소설가 이호철이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에 묘사된 당시 서울 풍경이다.

인구 380만 명이 살기에 서울은 너무 좁다는 불평이 눈에 띈다.

오늘날 1,000만 인구가 모여 있는 서울과 비교할 때 380만 인구가 '꽉꽉 차있다'는 표현은 과장되거나 엄살같이 들린다.

하지만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3~1966)이 진행되던 재건 시대에 서울은 모든 이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사람들로 산비탈에는 판잣집들이 들어찼고, 도로는 자동차와 전차와 사람들로 혼잡하였다.

주택과 상하수도 등의 기반시설이 채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구는 매년 20~30만 명씩 늘어났다.

오죽했으면 당시 윤치영 서울시장은 "도시계획을 잘 한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몰려올 것이므로 인구집중을 유발하지 않기 위해서도 서울은 도시계획을 안 하는 것이 좋다"고 공언까지 했을까.

서울이 개발될수록 자본과 시설이 인재의 수도권 편중은 극심해졌다.

1960년대 강변북로, 윤중로, 북악스카이웨이, 남산1•2호터널, 서울역 고가도로 등의 도심부 간선도로와 고가도로, 도심과 외곽을 잇는 방사선도로와 순환도로까지 건설되는가 하면 주택건설 붐이 일었다.

그러는 동안 지방의 발전은 지연되거나 미미했다. 이러한 기형적 발달을 바로잡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대도시 인구 집중을 억제하는 방침들을 마련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행정수도건설이라는 특단의 대책이 강구되었다.

최초로 백지계획이 외부에 노출된 것은 1975년 8월 2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하계 휴양지였던 경남 진해에서 청와대 출입기자들어게 "수도권 인구 분산정책의 획기적인 방안은 수도를 욺기는 것밖에 없다"며 수도 이전에 관한 구상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사회에 혼란을 야기할 만한 정보인 만큼 대외비로 처리되었다.

이듬해 6월, 행정도시 건설계획의 총지휘를 맡은 김종필 총리는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가급적 금강변)에 인구 50만 명 규모의 입지를 선정하고 수도권 대학과 산업단지 분산에 관한 방안을 마련했다.

그리고 1977년 2월, 박정희 대틍령은 서울시 연두순시 자리에서 '통일이 될 때까지'라는 단서를 붙여 행정수도 이전 계획을 공식 선언했다.

곧 임시행정수도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철저한 보안 속에서 전문 설계팀이 가동되었다.

임시 행정수도는 청와대 오원철 중화학공업기획단장(경제2수석) 책임하에 무임소 장관실의 박봉환 실장(부단장)이 주관하는 작업팀을 구성하고(도시계획, 조경, 행정분야), 설계 권위자들로 자문단도 구성하였다.

1978년 초에는 지속적 연구를 위해 KIST 내에 지역개발연구소를 부설하고 국내외의 전문가를 초빙하여 연구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1979년 1월 당시 KIST 교통경제연구실에서 지역개발연구소로 전보되어 교통연구팀에 참여했던 임승달 교수(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위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지역개발연구소 소장으로 건설부 관료 출신인 황용주 박사(버클리대학 도시계획 박사)를 청와대가 직접 임명했고 강홍빈 박사(MIT, 도시설계), 황기원 박사(하바드대 조경학), 이인원 박사(일리노이대 교통학 박사),) 김창호 박사(일리노이대 교수, 교통) 등을 영입하였다.

또한 국내 유수의 전문가들(임창복, 안건혁, 강위훈, 윤길선, 염형민 등)과 역량 있는 연구원(노정현, 유재영, 조중래, 이용재, 이한준, 김수철 등)을 채용하여 도시계획 및 교통분야의 최고 연구진을 갖춘 상태였다.

백지계획에 따르면 행정수도의 입지는 조치원과 공주 사이의 구릉지대 반경 10킬로미터의 장기지구로 선정되었으며, 1980~1996년까지 총사업비 5조 2,900억 원(77년 불변가격 기준)으로 자족도시를 건설하도록 설계되었다.

3년 동안 국내외 전문가 391명이 힘을 합쳐 만든 이 설계안을 박정희 대통령은 곧 재가했다.

그러나 국무총리 결재와 국무회의 의결을 앞두고 10•26 사건과 12•12 신군부 군사쿠데타가 터지면서 백지계획은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백지계획이 그대로 수행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후로 수도권 과밀해소와 지방분권이라는 절박한 과제는 여전히, 아니 더 절박해졌기 때문이다.

현재 수도권은 대한민국 5,000만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수가 밀집해 있고, 중앙행정기관•공공기업의 본사•정부출연기관•100대 기업 본사 80~90퍼센트가 모여 있는 메갈로폴리스가 되어버렸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 분야의 권력이 수도권에 집중된다는 것은 어떤 병폐를 부르는가.

지방은 경제적 문화적 격차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고, 주민 소득의 저하로 생활수준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중앙의 형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시민들은 지독한 교통난과 환경오염에 시달리고, 턱없이 높은 부동산 시세에 짓눌려 무주택자 또는 하우스푸어로 전전한다.

2004년에 쓴 기자의 자조 섞인 글을 보면, 앞서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에서 소개된 1960년대 서울의 풍경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위성도시 10여 개를 더 만들고 그나마 위태 위태 남아있는 그린벨트 등 녹지를 모두 풀어 수도권 전역을 콘크리트로 뒤덮지 않고서야(수도권에) 충분한 토지와 주택을 공급할 방법이 어디 있나.

'토지'가 아니라 '허공'을 충분히 공급해 앞으로 서울 사람들은 모두 최소 60층짜리 건물에서 살아야 하고 도로도 복충, 복복층화 한다면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을 것이다.

근본적인 수요 요인을 관리하지 않고 공급만 늘린다는 방책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은 서울의 교통정책이 잘 보여주고 있다."(김준형. '수도, 절대 못 옮겨가는 10가지 이유?'. <머니투데이>. 2004. 7. 27)

그동안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서울 및 수도권 과밀을 억제하기 위해 펼쳐온 온갖 정책들이 근본적인 처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물리적인 규제와 대중요법들이 악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대표적인 예가 1970년대 서울 강남 개발정책과 과천 신도시개발, 그리고 1980년대의 신도시 건설이다.

논밭이었던 강남 일대를 개발하면서 이곳은 부동산 투기의 온상이 되어버렸고, 수도권 인구를 재배치하기 위해 개발한 과천시는 수도권 밀집의 신호탄이 되어 분당•평촌•일산•중동•산본 등 경기도 5개 지역까지 수도권 범위가 확산되었다.

1990년대에는 정부 제3청사를 대전에 건립하여 11개 행정기관을 이전시켰으나, 인구 및 권력 분산 효과는 미미했다.

그 결과가 오늘날 기형적인 2,500만 명의 수도권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김대중, 박정희 대통령의 대리자를 자처했다.

어쩌면 그는 이 과업의 최적임자였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강력한 분권주의자, 분산주의자"라고 고백한 바 있듯이,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지방자치를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1990년대 초반부터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조직하여 여러 사회과학 연구자들과 함께 지역 균형발전을 열정적으로 탐구해온 인물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수도건설이라는 대선공약은 그것이 불러일으킬 사회적 파장을 고려할 때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정치권과 수도권 세력의 저항도 문제려니와 과연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머리를 맞대고 행정수도건설을 논의했던 정책자문위원들은 세 가지 '경고'와 함께 공약발표를 반대하고 나섰다.

'수도권 주민의 반발을 고려할 것, 세계 대도시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수도의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음, 단기적 차원에서는 고려하지 않는 것이 좋음.'

노무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를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믿고 의지했던 정치 선배와 참모들이 대부분 반대했다. 

서울과 수도권 표를 잃을 위험이 높아서 선거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국가적 견지에서 신행정수도가 필요하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후보인 내가 고집을 부렸다. 대통령 선거는 승패도 중요하지만 국가발전에 꼭 필요한 의제를 국민에게 제출하는 기회이기도 하다고 설득했다.

(•••) 어쨌든 나는 정치적 손익 계산에 의거해 신행정수도건설 공약을 발표했던 것은 아니다.

국가적으로 절실하게 필요한 정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난관을 무릅쓰고 추진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세종시 건설은 어느 날 갑자기 급조된 계획이 아니었다.

1970년대 두 대통령이 구상했던 것을 2000년대의 대통령이 바통을 이어받은 필연적인 과제였다.

여러 차례의 위기와 굴절을 거치면서 '행정수도'가 아닌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 명패를 걸고 출범하게 되었지만, 건설을 완수하는 2030년 무렵에 어떤 명패가 걸리게 될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