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국민에 국민을 위한

3. "서울이 수도면 지방은 하수도냐!"

2004년 10월 24일 정오, 연기군 남면 종촌리 성남고등학교 앞마당에 3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 트럭에서 거대한 허수아비가 마당에 내례졌다.

누군가 나서서 허수아비에 불을 댕기자 불길이 위로 치솟았다.

"행정수도를 돌려달라!"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주민들은 구호를 외쳤다.

지역을 대표하는 김춘배 씨(연기군 체육회 부회장)가 '충청권 단결'이라는 혈서를 썼다.

집회장 옆의 논에서는 몇몇 주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논밭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이날 연기군 주민들을 거리에 나서게 만든 당사자는 헌법재판소였다.

사흘 전,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관습헌법상 수도는 서울이고, 수도를 이전하는 문제는 국민투표에 부쳐야 하기 때문에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은 헌법에 위반한다는 논리였다.

이 결정은 신행정수도 사업의 중단을 뜻하는 것으로, 충청권 주민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2003년 12월에 국회 의결을 거쳐 법안에 통과되었고 2004년 5월부터 입지 선정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행정수도 이전사업이 헌법 위반이라니, 유력 입지로 부상한 연기군민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신행정수도 예정지역으로 부상하기 전까지 연기군은 그저 조용한 촌 마을이었다.

사람들은 땅에 의지한 채 땅을 밑천 삼아 나무처럼 조용히 살아갈 뿐이었다.

특히 천안, 대전, 공주, 청주라는 4대 강군(强郡)에 둘러싸인 채 복숭아씨처럼 콕 박힌 지리적 특성 때문에 평소 연기군은 큰 목소리를 낼 경우도 드물었다.

그런 그들로서도 땅을 내주는 문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국가 균형발전이나 인구분산 정책이라는 명분이야 위정자들의 몫이지 평범한 농민들의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이들의 진짜 걱정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향을 등지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 농사를 지어야 할지, 행정수도에 남아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니 내 터전에 신행정수도가 들어서는 걸 환영할 지 거부할지조차도 판단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신행정수도건설 공약은 주민들에게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해주었다.

국가의 정책으로 낙후한 지방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과 기대가 형성되자 국민으로서 신행정수도 계획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모아졌다.

더욱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일이 아니던가.

물론 모두가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600년 대대로 연기군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온 부안임씨 종친회는 특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종친회 측은 "3만 기에 달하는 집성촌과 선조들의 묘 3만여 기가 여기에 모두 있는데 이곳에 수도가 들어선다면 우리 문중은 멸문지화를 당한는 것과 같다"면서 수도 이전을 중단하는 헌법소원에 찬성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런 혼란이 가라앉지 않은 와중에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이 위헌으로 결정되자 주민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 사업은 자신들이 요구한 게 아니라 정부가 설계하고 약속하고 설득한 사업이었다.

이미 입지가 확정되어 주민들의 절반 이상은 다른 지역의 대체 농지를 구입하느라 주민들은 농협에서 1,000억 이상의 돈을 대출받아 놓은 상태였다.

사업이 물거품이 된다면 연기군과 공주시의 농민들은 빚더미에 앉게 될 판이었다.

10월 24일의 집회 장면이 어느 방송사의 생중계로 전국에 전파되었다.

이것은 기나긴 투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다음날 민•관•정 대표 40여명이 연기군청에 모여 대책회의를 했고, 신행정수도 지속추진 연기군대책위원회(황순덕 대표, 김일호 집행위원장)를 결성했다.

그리고 10월 29일 조치원역 광장에 주민 5,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제1차 총궐기대회를 열었다.

당시 이기봉 연기군수는 "한나라당이 법을 만들 때는 언제고 헌법재판소에서 위헌결정이 나도록 역할을 하는 것은 또 뭐냐.

운전수가 운전을 잘못해 차멀미가 나기에 한나라당에 더 이상 몸담고 있을 수가 없다"면서 탈당을 선언했다.

이에 한나라당 당적을 갖고 있던 충남도의원과 연기군의원들도 잇달아 탈당했다.

제2차 연기군민 1만 궐기대회가 열리던 11월 22일의 분위기는 예사롭지 않았다.

이날 연기군 남면에서 조선일보 지국을 운영하던 이종복 씨는 건물에 봍어 있던 '조선일보' 간판을 떠어내 트럭에 매달아 궐기대회장인 조치원역 광장까지 끌고 왔다.

간판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여 화형식을 치르고 외쳤다.

"내가 조선일보를 20년 했는데 이제 때려 치우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절독해주세요!"

이는 자신의 오랜 생업을 포기하겠다는, 집회용 퍼포먼스를 넘어선 선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롯한 일부 언론사들은 신행정수도건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왜곡된 비판 여론을 조장해왔다.

행정수도가 아니라 천도다. 서울 청사 제값에 팔 수 있나, 국민투표라는 의견수렴 과정이 빠졌다.

나라경제가 어려운 상황에 120조원을 허비해야 하나, 충청도는 부동산 투기의 경연장이다.

통일 운운하면서 왜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는가 하는 것들이 보수 언론들의 주장이었다.

객관적 사실과 진실 보도를 목숨처럼 삼아야 할 언론사의 이러한 비틀린 보도방식은 행정수도에 대한 국론을 분열시키고 충청지역민들을 지역 이기주의로 몰았다.

이날의 집회 열기를 뜨겁게 달군 한 사건이 있었다.

간판 화형식에 앞서 남면대책위원회 위원인 강선호 씨가 갑자기 연단 위로 뛰어 오르더니 "간판 화형식에 앞서 할 일이 있다"면서 윗옷을 벗어졎혔다.

그러자 흰 천을 동여맨 허리가 드러났다. 그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드는 순간 사람들은 '할복'을 눈치 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동료들의 제압으로 이 사건은 헤프닝에 그쳤으나 집회에 참여한 1만여 주민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충남도민들의 함성은 점점 더 크고 또렷해졌다. 연기군 남면을 비롯하여 대전, 공주, 천안, 청양 등지에서 규탄 성명이 발표되었고, 조치원역 광장에서는 삭발식과 거리 행진을 거행하는 등 신향정수도건설이 다시 추진되는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촛불을 들겠다는 결의로 릴레이 촛불문화제가 이어졌다.

집회를 주관한 신행정수도 지속추진 연기군대책위원회 황순덕 공동대표와 이진희 기획위원장은 무기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이에 뜻을 모으는 성금과 격려의 손길이 줄지었다.

이 여세를 몰아 12월 4일에는 서울 종묘공원에서 상경집회를 벌였다.

충청 변방에서 아무리 외쳐봤자 국민의 동의를 얻기 어려우니 조치원역 광장을 떠나 본진(本陣)인 서울에서 호소해보자는 취지였다.

초겨울 진눈깨비 흩날리던 궂은 날이었다. 이른 아침 충남 각 지역에서 관광버스 50여 대가 서울로 출발했고, 전국의 시민단체들과 합류하여 참가자는 약 3,500여 명을 이루었다.

신행정수도건설은 충청권뿐만 아니라 수도권의 발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변하면서 원안 추진의 정당성을 서울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집회에 이어 종로1가까지 행진을 하면서 '서울 시민들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나눠주기도 했다.

당시 집회를 수행했던 대책위원장 중 한 명인 홍석하 씨는 이날을 뜻 깊은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다.

"올라간 분들은 대부분 어르신들이었어요. 평일에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참석하겠어요, 마침 그날 비가 오더라구요.

일회용 우의까지 준비해서 서울 종로로 가는데 차가 밀리고 하니까 짜증이 나서 행정수도 반대하고 관두자고 투덜거리는 분도 있었죠.

겨우 종묘공원에 도착했는데, 원래 거기엔 어르신들 많이 계시잖아요.

제가 먼저 단상에 올라가서 사회를 봤는데, 그분들이 바로 화를 내시더라구요.

"노무현이 시위하라고 시켰냐" 
"촌놈들이 올라와서 떠들어봤자 가당키나 하냐, 행정수도라니, 턱도 없는 일이다" 이런 식이었죠.

어르신들의 손가락질에 기도 죽고 착잡하기도 했죠. 그런데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관두자고 투덜대던 주민 어르신들의 목청이 정점 커지더라구요.

서울 분위기가 냉랭한 걸 보고는 뭔가 깨달은 거죠. 아; 우리끼리 지방에서 외쳐봤자 소용없구나.

그때 내부적으로 강하게 결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행정수도라는 사안은 충청도민에게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으나 서울시민에게는 지역 이기주의로 비칠 뿐이었다.

상경 집회에 참여한 주민들은 서울시민의 싸늘한 반응에 온도 차이를 실감하긴 했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고한 의지를 다졌고, 전 국민을 상대로 홍보활동을 전개했다.

한낱 촌구석의 필부(匹夫)였던 이들이 이제 '국토 균형발전의 전도사'가 되어 전국을 누비며 캠페인에 나선 것이다.

신정연휴에는 열차승객들에게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필요한 것은 보일러가 아니라 행정수도입니다"라고 적힌 홍보물을 나눠주면서 행정수도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설 명절에는 경부고속도로 천안, 유성 나들목에서 귀성객들에게 홍보물을 나눠주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2005년 3월 초 후속대책안인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이 확정되는 순간까지 주민들의 발로뛰는 노력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졌다.

이러한 고통과 갈등의 과정은 신행정수도 예정지역으로 알려진 그 순간부터 예정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정부의 실행의지에 대한 불안, 당리당략을 앞세우는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뿐만 아니라 이해관계가 다른 주민들 간의 반목까지 겹치면서 연기•공주지역은 '아우성'의 근원지가 되었다.

그러나 신행정수도건설에 대한 위헌 결정을 계기로 지역주민들은 '개안(開眼)'의 체험을 했다.

국토 균형발전이 무엇이며 행정수도의 의미는 무엇인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뜻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그 뜻을 공유하는 이들과 힘을 모으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는 5개월의 소중한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