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국민에 국민을 위한

2. 40년 숙원사업을 이루다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2월 초,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열띤 정책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가장 큰 쟁점은 두말할 것 없이 노무현 후보의 '신행정수도 이전'' 공약이었다.

당시 이회창 후보를 대표하는 한나라당과 노무현 후보를 대표하는 민주당이 주고받은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회창
행정수도 이전은 정부와 국회, 산하단체들이 다 가면 국가의 수도가 옮겨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울 공동화현상을 불러와 서울의 부동산 값이 떨어지게 되고 많은 서민들이 고통 받을 것이다.

노무현
행정기능만 신행정수도로 욺겨가는 것이고 서울시민을 다 모시고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땅값이 떨어지지 않는다.

행정수도 이전은 교통•교육•공해 등 서울 과밀화 현상으로 고통 받는 서민들을 위한 것이다.

이회창
6조원으로 행정수도를 옮기기 어렵고 40조원이 소요될 것이다.

노무현
도시 기반시설을 만드는데 드는 돈은 개발•분양으로 회수하면 되고 관청 이전에는 17만 9,000평(59만m2)에 1조 6,000억원이면 되므로 모두 6조원이면 가능하다.

이회창
통일 문제를 도외시한 좁은 시각이다.  독일이 통일 후 신수도를 베를린으로 다시 이전한 것 등을 감안하면 우리도 통일에 대비해 수도의 입지를 다시 검토해야 하며, 행정수도 이전은 실질적인 천도이기 때문에 남북통일을 고려할 때 부적절한 방안이다.

노무현
통일이 되더라도 국가연합이 단계 등을 감안하면 상당기간 남북이 각각의 행정수도를 가져야 한다.

현재 수도권 체제로 통일이 되면 북한 주민의 수도권 유입이 가속화돼 수도권 집중문제가 더욱 심화될 것이며 통일 후 휴전선 부근의 개성이나 판문점 등으로 천도하자는 것도 새로운 수도권 집중 문제를 초래할 것이다. 

이회창
대전과 청주는 갈수기에 물 부족 현상을 겪는다. 댐을 새로 만들 계획 등도 고려됐느냐.

노무현
충남 중부권 광역상수도사업, 아산 공업용 수도사업, 대청댐 광역상수도 2차사업 등 이미 추진 중인 충청권 상수도 확장사업이 마무리되면 별 문제가 없다.

이회창
수도 이전 문제는 국가 전체의 문제인 만큼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데 특정 정파의 후보가 대선 공약화하는 방식은 부적절하며 사회적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노무현
행정수도 이전계획은 선거를 의식한 즉흥적인 공약이 아니라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해온 산물이다.

지난해 5월부터 여론조사를 벌였고,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에 추진하거나 연구한 자료 등을 충분히 확보해놓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직후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도 공방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한나라당과 수도권 기득권층, 보수언론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행정수도 이전으로 수도권은 엄청난 공동화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충청권 표를 공략하기 위해 천도를 한단 말인가?"

"서울 인구 50만명을 줄이려고 45조원을 쓰는가?"

"국민적 합의 없는 수도 이전은 위헌이다!"

수도권 공동화 현상에 대해 민주당은 부동산 재벌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며, 오히려 비대해진 수도권을 이대로 두면 오히려 집값이 폭등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행정수도가 건설되면 수도권에 대한 규제는 완화될 것이고, 경제•문화•교육적 매력은 공고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에서 '공약 검증팀'을 조직하여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면밀히 검토한 바, 행정수도 이전은 심각한 수도권 집중을 해소할 획기적인 발상전환이라고 평가함으로써 민주당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또한 2004년 OECD가 발표한 한국경제보고서 역시 이와 유사한 전망으로써 행정수도 이전의 당위성을 인정했다.

충청권 유권자들의 표를 노린 대선용 '공약(空約)'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이해찬 전 총리는 "수도권과 남부지방에서 잃을 수 있는 표를 계산해 보면 사실 이득을 볼 형편도 아니었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수도 이전을 밀어붙인 이유는 국가의 미래를 위한 절박한 과제였기 때문이며, "대한민국의 미래와 후손을 위한 또 하나의 사과나무를 심는 계획"이라고 강변했다.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최병선 교수는 지난 수십년 간에 걸쳐 국토의 균형발전과 농촌과 지방을 살리기 위해 동원 가능한 수단은 모두 제시되었으나, 역대 정권에서는 구호는 있으나 강한 의지와 실천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이제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선행되어 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최 교수와 더불어 공동위원장을 맡았던 김안제 교수도 같은 견해를 밝히면서 "극약 처방"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세종시 건설 이슈는 발화(發話)의 순간부터 정치판을 뜨겁게 달구었다.

뿐만아니라 학계, 언론계, 시민단체 등 사회 각계에서도 찬반논쟁이 들불처럼 일었다.

8년간 이어진 공방전 가운데 이 국책사업은 두 번에 걸친 헌법재판소의 판정을 받았고, 위헌과 합헌 결정을 반복하면서 '행정수도'에서 '행정수도'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도시 지위가 바뀐 사실만으로도 치열한 싸움의 과정이 입증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국가의 균형발전과 수도권 과밀 해소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는 데는 너나할 것 없이 동의하면서도 행정수도건설에 대해서는 각자의 이해관계에 묶여 평행선을 달렸다는 사실이다.

특히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을 통과시킨 당사자인 한나라당 의원들은 2004년 10월 위헌 결정이 났을 때 박수를 치며 환영하는 이율배반적인 현상도 빚어졌다.

또한 위헌 소송을 이끌었던 수도이전반대국민연합의 상임대표 최상철 서울대 교수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행정부 이전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며 수도 이전을 주장했던 인물이며, 1970년대에는 김안제 교수와 함께 '백지계획' 수립에도 참여했던 학자였다.

헌재의 위헌 결정문은 한동안 지식인들의 입도마에 오르내렸다.

가장 큰 논점은 수도 이전을 관습헌법으로 재단했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지 성문헌법 외에 헌법 관습법을 두고 성문헌법이 담을 수 없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수도 이전을 국회 과반수 입법으로 추진한 것은 헌법적 관행에 위배되는 것으로 위헌이다."(허영
명지대 헌법학 교수)

"수도=서울'이 관습헌법인가에 대해선 헌법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김선택 고려대 교수)  

"헌법 130조 국민투표권 규정은 성문헌법의 개정을 전제로 한 것이지 관습헌법의 개정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헌재의 법리 전개는 적절치 못하다고 본다."(장영수 고려대 교수)

"불문•관습법 위배라고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은 이제까지 우리 헌재 역사상뿐 아니라 세계 헌재 역사에도 없었다.

헌재가 국민 대표기관인 국회를 통과를 법률을 두고 관습헌법이란 논거로 무효화한 것은 우리 헌법의 기반인 대의제에 정면으로 배치된다."(임지봉 건국대 법대 교수)

"본말이 전도되었다. 특정한 법의 위헌여부를 판단하는 헌법재판소가 정책의 적절성 여부까지 판단할 수는 없다."(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헌재의 결정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근시안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더구나 그 과정에는 논리적 비약과 역사 왜곡마저 감행했으니, 마땅히 그에 대한 해명을 하고 적절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박영규 작가)

"헌재의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 결정은 위헌이다.

법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법 없다. 법 위에 사람 없다 함은 무엇을 일컬음인가?"(도올 김용옥)

헌재 결정 당시 소신 결정으로 화제가 된 재판관도 있었다.

9명의 헌법재판관 중에서 유일하게 각하 결정을 내린 전효숙 재판관으로, "서울이 수도라는 관행적 사실이 다수의견이 말하는 관습헌법이라는 당위규범으로 인정되기 어렵다"면서 관습헌법을 적용한 다수 견해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효숙 재판관은 훗날 어느 강연에서 국회가 고도의 정치적 사안을 정치로써 풀기보다 헌법재판소에 맡겨서 해결하려는 자세는 부담스럽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헌재 결정 직후, 정부 일각에서는 행정수도 이전을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있었으나 '새로운 답'을 찾겠다는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후속대책위원회가 곧바로 조직되었다.

신행정수도후속대책위원회는 우선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4개월 동안 여론 영향력이 큰 학술단체와 연구기관 등을 접촉하여 65차례의 세미나•토론회•공청회를 여는 한편 정치권과 시민단체와도 생산적인 의견을 나누었다.

그 결과 행정수도를 대체할 11개의 안이 마련되었고, 최종적으로 행정특별시, 행정중심복합도시, 교육과학도시 안으로 추려졌다.

그리고 여당과 야당은 갑론을박을 거쳐 2005년 3월 2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을 제정했다.

신행정수도건설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을 이끌었던 최병선 추진위원단장은 "우리나라에 수많은 주요 정책결정 과정이 있었지만 행정도시만큼 집약적이고 광범위한 여론수렴을 거친 경우는 아마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감회를 밝혔다.

수도 이전을 극력 반대하던 세력은 행정중심복합도시는 결국 새로운 이름의 행정수도일 뿐이라며 두 번째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행정중심복합도시를 수도로 볼 수 없다"며 기각 결정을 내렸다.

세종시의 가장 큰 고비가 신행정수도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특별자치시)로 변화되는 과정이었다면, 두 번째 큰 고비는 아예 '행정'을 빼버리고 '교육•과학중심의 경제도시'로 바뀔 뻔했던 순간일 것이다.

2009년 정운찬 국무총리를 앞세운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행정도시의 백지화를 위한 '세종시 수정안'을 주장하고, 보수언론과 학계가 역성을 들었다.

수정안을 주장하는 정부의 주된 근거는, 행정기관이 분산되었을 때 부처 간 긴밀한 의사소통과 협력이 와해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체 면적 중 청사 부지면적이 너무 협소하여 인구 분산이나 일자리 창출 효과가 미미하다는 것, 기업•대학•호텔 등의 민간시설을 유치할 세계 및 재정적 인센티브가 없어 자족도시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독일이 통일 이후 베를린과 본으로 수도가 나뉘면서 행정기능이 분산 운영되는 피해 사례를 들어 그 비효율성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정운찬 국무총리가 주도한 수정안에 따른 세종시는 어떤 도시일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교육과 과학과 산업기능이 융화된 자족도시'다.

세종시에 행정기관을 이전하는 대신 과학비지니스 거점도시로 만들고, 첨단•녹색산업도시로 육성하여 일자리 창출과 경제성장을 도모하고, 창조적 인재기반을 위한 우수대학을 유치하고, 환경과 성장이 조화되는 녹색도시를 조성하고, 스위스의 제네바처럼 국제기구 등이 입지할 국제교류지로 만든다는 것이다.

민주당과 자유선진당은 정치적 성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원안'을 고수하면서 대통령에게 국무총리를 해임할 것을 요구했다.

민주당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가 균형발전을 포기하는 정책이라고 비난했고, 2002년 대선 당시 행정수도 이전을 맹공격했던 이혀창 대표는 입장을 바꾸어 "앙꼬 없는 찐빵을 내놓고 있는 앙꼬 있는 찐빵보다 더 맛있다고 하는데, 이를 받아먹으면 바보가 될 것"이라며 지역적 관점에서 비판했다.

한나라당은 내부적 분열을 보였다. 김무성, 김문수 등의 수정안 지지세력과 박근혜 등의 원안 지지세력으로 양분되어 팽팽히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자 수정안을 국민투표에 붙이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고, 다양한 절충안들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수정안을 찬성하는 입장도 있었으나 비판의 목소리도 거셌다.

류기철 충북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 부처가 이전하면 도시가 자족성을 갖지 못하지만, 정부 부처가 이전하지 않으면 자족성을 갖는다는 정부 주장은 초등학생이 들어도 웃을 말이 아닌가.

행정상의 비효율 또한 반대를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이 행정도시를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행정부처의 이전이 초래할 자신들의 영향력 감소와 자신들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 등 재산가치의 하락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조명래 단국대 도시지역계획학과 교수는 수정안을 주장하는 이들이 노무현 포플리즘의 해악을 외치면서 정작 자신들의 정파적 포플리즘이 끼친 해악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대통령이 여러 차례 말을 바꿈으로써 생긴 신뢰의 상실, 수정을 둘러싼 국민적 갈등이 낳은 엄청난 사회적 비용, 세종시 사업 추진 지연에 따른 막대한 경제적 손실 등 해악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공격했다.

육동일 충남대 자치행정학과 교수도 수정안의 문제를 지적했다.

"행정도시특별법에는 당초 12부 4처 2청(현재 9부 2처 3청)의 행정부처가 중심이 되고 그 즌ㅇ심 밑에 과학기능, 기업, 대학, 첨단산업단지 등 자족적 기능을 보완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런데 정작 행정부처가 오지 않거나 축소된다면 과연 그것을 믿고 추진하려 했던 기업, 대학, 과학 기능들이 행정도시로 오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라면서 "더 좋은 대안은 없으며, 설령 억지로 만든다 하더라도 국민들은 믿지 않을 것이고, 믿게 할 방법도 더 이상은 없다"고 강변했다.

강상호 경희대 정치학 교수는 행정의 효율성을 위해 정치의 신뢰성을 저버리는 행위를 비판했다.

"세종시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이 강조하는 것처럼 원칙의 관점에서 고려되어야지 정치공학적 관점에서 고려돼서는 곤란하다.

문제는 청와대가 야당과 여당 내 친박세력의 주장을 정치공학적 접근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안 고수를 주장하는 세력이 어떤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치의 신뢰 문제는 정치공학의 문제가 아니고 원칙의 문제라는 것이다."

세종시 수정안은 2010년 6•2 지방선거로써 심판을 받았다.

충남지사에 민주당의 안희정, 대전시장에 자유선진당의 염홍철, 충북지사에 민주당의 이시종 후보가 당선되면서 여당은 충청권에서 전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전통적으로 충청권은 보수 여당의 표밭이었으나 세종시 원안을 바라는 충청 민심은 한나라당을 응징했다.

그 타격으로 정부도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추진력을 잃고 말았다.

결국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 표결에서 부결되었고, 2012년 7월 세종시는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 이름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일찍이 한국 현대사에서 이토록 긴 시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논쟁에 뛰어든 국가정챽이 있었을까.

이 정책의 역사는 짧게 잡으면 2002년부터지만, 길게 잡으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행정 부수도 건설을 발표했던 1971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세종시 건설은 꾀 오래전부터 예정된 사업이었으며, 국가 균형발전과 지방 분권이라는 과제가 얼마나 중차대한 시대적 요구였는지를 입증한다.

이 사안으로 대한민국의 입법•사법•행정부가 모두 뛰어들어 치열한 다툼과 협력을 벌였다는 것, 한국 각계각층의 지성인들이 국가의 미래가치에 대해 다각도로 깊게 논의를 나누었다는 것만으로도 세종시건설의 의미는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