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국민에 국민을 위한

4. "대통령님, 정말 세종시가 안 생기나요?"

2005년 3월, '행정수도'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제목으로 바뀐 건설특별법이 통과되었을 때 주민들은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뿐, 3개월 후 또 다시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이 헌법재판소에 회부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번의 위헌 확인 요청을 제기한 단체는 수도분할반대국민운동본부(공동대표 이재오, 여인국, 장기표)를 포함한 222명으로, 위헌이라는 주장의 논거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은 실질적으로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과 동일한 것으므로 역시 관습헌법에 위배되며 국민투표권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즉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은 국토균형발전을 위한 사업이 아니라 망국적 '수도분할'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제 막 높은 산을 넘은 연기•공주 주민들로서는 숨 고를 새도 없이 새로운 산을 타넘어야 하는 형국이었다.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추진위원화는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법적 대응에 나섰고, 행정도시사수연기군대책위원회 위원들을 비롯한 20여 명의 주민대표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서울로 달려가 헌법재판소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편협한 수도권 이기주의에 대항하는 주민의 입장을 대신한 최소한의 항변이었다.

그리고 5개월 뒤인 11월 24일, 헌법재판소는 각하 결정을 내렸다.

이후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의 길은 순탄할 것처럼 보였다.

2,200만여 평의 예정지역이 확정되자 곧 건설추진위원화는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토지보상에 나섰고, 도시건설의 철학을 세우기 위한 국제공모사업을 추진했다.

또한 건설청은 전 국민대상 공모전을 통해 '세종시'라는 도시명칭을 제정하고 개발계획에 착수했다.

적어도 정권 교체기인 2007년 하반기까지는 슬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2007년의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다시 또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 단초는 세종특별자치시설치법이었다. 세종시가 광역과 기초단체를 겸하는 '특별자치시'로서 어느 지역을 관할하며 어떤 책무를 지니는지를 규정하는 법안으로, 초안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행정타운이 들어설 예정지역과 주변지역 그리고 전여지역을 결정하는 문제로 연기군, 공주군, 청원군, 대전의 의견 차이로 갑론을박의 과정이 있었다.

확정된 관할지역을 고시할 수 없으니 설치법의 입법은 차일피일 지연되고 있었다.

본래 수많은 이해당사자가 간여하는 복잡한 국책사업에 이견과 분쟁은 필연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입장을 확인하고 논의를 좁히는 일인 만큼 시일이 걸리기도 하고 감정이 다치는 일도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 속에서 치열하게 모색하고 설득하는 지혜를 얻게 되고, 타협하는 방법도 배우는 법이다.

그 지루한 과정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나면, 그 경험은 이후 큰 자산이 되기도 한다.

사실 정부청사와 행정타운 건설 설계가 진행되고 있고, '첫마을'  주거지의 기초공사가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에 세종특별자치시설치특별법은 곧 타결될 것으로 주민들은 믿었다.

그러나 법안이 국회를 통과되기까지는 3년 넘는 세월이 허비되었다.

발목을 잡은 진짜 문제는 2009년 이명박 정권에서 꺼내든 세종시 수정안 카드였다.

그해 9월 정운찬 국무총리 내정자는 기자간담회에서 "세종시는 경제학자인 내 눈으로 볼 때 효율적인 모습은 아니다.

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에 원점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원안대로 추진하지는 못할 것"이라며 수정안의 필요성을 내비쳤다.

행정중심복합도시가 갖춰야 할 중요한 기능, 즉 행정의 효율성과 도시의 자족성 측면에서 미흡하다는 게 주된 근거였다.

수정안이 내세운 대안은 과학비지니스벨트 거점지구로 지정하고 대기업을 유치하여 교육•과학중심의 경제도시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충청민심은 또 다시 들끓었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분노로 타올랐다.

신행정수도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변경된 것까지 수용하면서 애면글면 호소를 거듭해온 이유는 명실상부한 '행정중심'의 도시로 거듭나기를 원했기 때문이지 언제 철수할지 모를 대기업에게 땅을 내주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혹여나 하는 심정이었다. 대선에 출마한 이명박 후보가 충청도에 내려올 때마다 원안대로 이행하겠노라 수차례 약속하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행정도시 건설안으로 인해 충청도는 계속 우롱을 당해왔다.

신행정수도를 지어주겠다고 하더니 헌법에 위배되어 안 된다고 하고, 후속안인 행정중심복합도시를 내놓고는 또 다시 위헌 소송에 발목 잡히고, 이번엔 아예 충청출신의 국무총리를 내세워 원안과는 거리가 먼 '수정안'을 밀어붙이려 하고 있지 않은가.

주민들은 다시 농사일을 팽개치고 거리로 나섰다.

"우리 500만 충청인은 각본에 맞춰 발언하는 듯한 정운찬 씨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세종시를 원안과 다른 형태의 도시로 대체하거나 축소하면서 우리 충청인을 설득하겠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며 그 같은 총대 메기 대가로 총리 후보지명을 수락하였다면 이는 나라를 팔아 먹은 이완용과 다를 바가 아닐 것이다.

대통령이 충청지역 출신 총리로 하여금 충청인의 염원을 설득하겠다는 것은 지역주의를 이용한 얄팍한 권모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세종시건설은 국가균형발전을 목표로 한 참여정부와 MB정부가 국민에게 공약으로 약속한 최대 국책사업이다.

이에 우리 연기군민들은 수백 년간 함께 해 온 조상의 선영과 삶의 터전을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 기꺼이 다 내어주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세종시를 세계적 명품도시로 만들겠다고 공약하였고, 세종시의 차질 없는 건설은 당시 한나라당의 공약 사항이었다.

원안대로 추진하는 것은 정부의 대국민 신뢰 문제이다.

정운찬 총리 후보자의 일련의 망언은 조건부 총리임을 만천하에 고백하는 결과가 되었다.

대국민 사기극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정운찬 씨는 충청인들에게, 아니 온 국민의 백년지대계인 국가균형발전에 매국적인 역할을 자임한 것이나 다름없다.

500만 충청인은 세종시의 정상건설을 위한 원안추진을 강력하게 촉구한다."(2009. 9. 22 행정도시사수연기군대책위원회 성명서)

2009년 10월 30일, 연기군을 방문한 정운찬 국무총리는 세종시 건설현장을 들렀다가 9일째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유한식 연기군수를 찾았다.

충청 민심을 달래고 설득하러 온 길이었으나 '대통령이 해결할 일이니 국무총리는 나서지 말라'는 질책을 받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단식 열흘째인 이튿날, 유한식 군수가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가자 그때부터 각 지역 단체 소속회원들은 릴레이 단식 농성을 벌여나갔다.

국무총리가 주관하는 민관합동위원회가 세종시 수정안에 착수하던 무렵인 11월 27일, 이명박 대통령은 TV 생중계로 '대통령과의 대화'에 나섰다.

그날 질문자로 나선 유한식 군수는 대통령에게 세종시 수정안을 반대하는 주민의 입장을 전달한 뒤 이렇게 비판했다.

"대통령도 10여 차례 이상 약속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약속을 파기하면 어느 국민이 정부와 대통령을 믿겠습니까?

저는 국민에 대한 약속과 신뢰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법을 스스로 지키고 상호 신뢰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다. 방송사에서는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 질문 내용을 사전에 체크하여 방송사고가 벌어지지 않도록 대비하는데, 군수가 갑자기. 질문지에 없던 직격탄 발언을 해버린 것이다.

군민의 심정을 대변하는 군수의 태도에 이명박 다통령은 "군수는 주민들의 이해에 뽑힌 것도 있지만 나라를 걱정할 공직자로서의 의무도 있다"면서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다.

이 사건으로 유한식 군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공무원 신분을 망각하고 머리띠를 두르고 각종 집회에 참석했으며 대책위원회에 예산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검찰청에 고발까지 당했다.

그러자 연기군을 비롯한 충남도민들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삭발과 단식에 동참한 조선평 의원(연기군의회 의원, 대책위원회 상임대표)는 자발적으로 참여한 주민들의 힘이 없었다면 그토록 오랜 집회를 이어갈 수 없었을 거라고 술회했다.

"수정안에 대한 정부 비판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 삭발을 하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지원자 중에서 추려야 할 상황이었어.

삭발을 감행한 여성분은 눈물을 흘리며 정부에 쓴소리를 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

'삭발을 감행한 여성분'은 2006년부터 여성단체협의회장을 맡아 줄곧 촛불문화제와 여러 집회의 뒷바라지를 해왔던 정준이 씨다.

종갓집 종손 며느리로 시부모를 모시는 가정주부인 그녀가 2009년 여름 조치원역 광장에서 삭발을 했을 때, 시어머니는 나무라기는커녕 "생각보다 이쁘다"며 격려해 주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가는많은 주민들이 난생처음 거리로 나가 촛불을 들었다.

촛불문화제가 100일째를 맞는 2010년 1월 20일, 그간 주민들이 참여한 활동기록이 발표되었다.

연기지역의 50개 단체가 순번을 정해 촛불문화제를 이끌었고, 1개 읍, 7개 면 대표자들과 200여 리의 마을주민들이 참여했으며, 90여 건의 결의서가 낭독되었고, 107명이 삭발에 동참했고, 442명이 89일째 릴레이 단식이 있었다.

이토록 오랫동안 평화롭게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진행된 촛불문화제는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일반 주민들의 행동이었기에 그 뜻이 더욱 깊다.

그 무렵 촛불문화제에서 당시 7세의 안서연 어린이가 단상에 올라, 대통령께 드리는 편지를 낭독했다.

"새서울이 우리 지역에 온다기에 서울처럼 발전하고 친구들도 많아지고 높은 집도 생기고 시장도 커지고 큰 병원도 생겨서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세종시가 안 생기나요? 

설마 나라에서 거짓말하시겠어요? 우리 지역 어른들이 국회에 사정 좀 해보세요.

국민을 잘살게 하고 적의 침략을 막고 국민 건강을 지켜 주시는 대통령님! 

(•••) 서울 사람 너무 많아 눌려 죽어요. 한가롭고 경치 좋은 우리 고장 꼭 만들어주세요.

대통령님, 건강하세요.

2004년 이후 2010년까지 주민들은 수많은 탄원 아이디어를 개발했다.

직무유기 혐의로 국무총리를 검찰에 고발했고, 원안사수기원제, 횃불봉화제, 프리허그, 6일간의 삼보일배 행진, 거리서명운동이 이루어졌고, 주민 1,000여 명의 주민등록증과 삭발한 멀카락을 국무총리실에 전달하는 시도도 감행했다.

그런가하면 5만여 명의 연기군민의 서명을 모아 수레에 실어 행정자치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국민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해보겠다는 간절한 심정의 발로였다.

그 염원이 하늘에 닿았다는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에서 부결되었고, 2010년 12월 원안대로 행정중심복합도시가 건설될 수 있는 세종특별자치시 설치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