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로드 • 여정의 시작

1. 균형발전의 서막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신행정수도 건설을 공약으로 발표했다. 

이 공약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당시 비밀리에 추진되었던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백지계획' 프로젝트를 응용한 것이기도 하다.

정치권과 사회 각계각층은 뜨거운 논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행정수도건설은 대한민국의 균형발전을 위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였다.

 “형?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충청권 표를 얻으려는 선거 전략일거야. 반대 여론을 키워서 백지화시킬게 뻔해.”
 “충청도 사람들만 멍청도 소리 듣게 생겼네.” 

바쁘게 조치원역을 빠져 나가던 형제의 대화뿐만이 아니었다. 역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우려 섞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충청도에 엄청난 투기바람이 불겠군요.”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수도가 두 개라니, 웃기는 발상 아닙니까?”
 “포퓰리즘이겠지.”  

 2002년 9월 30일, 노무현 후보의 민주당 중앙선거대책본부 출범식이 있었다.

단상에 오른 노무현 후보는 수도권 집중과 비대화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여 '국가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건설하여 청와대와 중앙부처를 이전하겠다는 획기적인 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한계에 부딪힌 수도권 과밀현상과 불균형한 지역 경제발전 믄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었다.

기나긴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신행정수도건설은 대선공약용으로 급조된 기획이 아니었다. 이미 1970년대부터 연구 조사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1971년 제7대 대선에 나선 김대중 후보가 최초로 '대전을 행정 부(副)수도로 정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고, 1977년 박정희 대통령도 서울시 연두순시에서 서울의 인구과밀해소와 군사안보를 위해 임시 행정수도를 건설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임시 행정수도계획에 관한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하여 중화학공업단장(경제2수석 오원철) 책임하에 실무기획단을 꾸려 청와대에서 업무를 직접 챙기도록 하였다.

1977년 7월 22일 '임시행정수도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이 제정 공포되고 기획단 내에 실무자 작업팀과 자문단이 구성되었으며, 1978년에는 KIST 내에 지역개발연구소(소장 황용주)을 설립하여 강홍빈 박사(연구팀장) 등 국내외 전문가를 초빙하여 백지계획을 구체화하였다.

백지계획은 구체적 입지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상적인 가상도시계획을 수립하고 도상 시뮬레이션을 통해 여러 계획과제를 도출하기위한 것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금강변 장기면 일대를 중심으로 백지계획이 수립되었고 이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북쪽의 국사봉과 남쪽 금강변의 장군봉 축을 중앙에 두고 동서 12km 구간을 도시구역으로 정하여 만든 이 백지계획안은 현재의 행정중심복합도시 구역과 일부 일치한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당대 최고의 인재 150여명이 투입되었고, 2년 이상에 걸쳐 치밀한 연구와 조사가 진행되었다.

1979년 기본설계와 교통계획 및 중앙기관 이전계획을 세우고 '임시행정수도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까지 제정하여 공청회와 주민여론수렴 과정을 남겨 놓고 있었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백지계획'은 완전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당시 청와대 집무실 책상 위에는 최종 발표를 앞두었던 백지계획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이 비밀스런 프로젝트가 수립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어떻게 20여년이 지나서 다시 한 번 빛을 보게 되었을까? 

1970년대 대한민국의 상황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자원과 자본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당시 단시간에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업화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특정지역에 집중 투자하는 불균형 성장전략으로 인해 외형적으로는 고속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인구 및 산업의 수도권 과밀현상이 빚어졌다.


지역 간의 성장 격차와 불균형 발전을 해소하기 위해 1970년대에는 서울 인구의 지방 분산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이 수립되었고, 1980년대 이후부터는 수도권 비대화를 억제하기 위한 정책들을 펼쳤다.

이에 따라 1984년 수도권정비계획법이 제정됨으로써 수도권에서 귄역별 행위제한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로 인해 오히려 수도권 개발이 확대되었고, 1989년에는 수도권 내에 5개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수도권이 더욱 비대해졌다.

이후 1990년대 들어서는 수도권의 개발규제가 완화되더니, IMF관리체제라는 경제위기를 맞아 수도권 과밀현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수도권 개발과 규제에 대한 정치권의 목소리는 드높았다.

결과적으로 수도권 집중 현상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해소되기는 커녕 심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서울공화국 지방식민지"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행정수도의 이전건설을 통해 국가의 중추관리기능을 분산하는 수밖에 없었다.

충청권의 새로운 행정수도건설!
처음 이 공약이 발표되었을 때 비판여론은 없었으며; 충청권 지역은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면서 신행정수도건설에 관심이 쏠리자 여기저기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야당인 한나라당은 거세게 반발했다. "표 얻기 위해 하는 소리도 좋지만 결국 지역민에게 좌절감을 줄 것이고, 실현성이 전혀 없다.

서울은 서울에 있되 대전은 과학기술수도로 만들어 거기 필요한 기관•기구가 옮겨가면 되는 것"이라는 견해였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또한 "행정수도 이전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으며 시기상조"라고 비판했다.

지정학적으로도 수도를 더 남쪽으로 이전하는 것은 국토의 균형발전으로 볼 때 옳지 않으며, 수도권의 인구 집중을 막기 위해서라면 지방의 경제•사회•문화•교육을 고루 발전시켜야 한다는게 그 이유였다.

이에 대해 민주당 문석호 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장은 "신행정수도를 충청권으로 옮긴다고 해서경제와 사회•문화 등 현재 서울의 모든 기능이 이전하는 것은 아니다.

신행정수도에는 청와대와 국회, 중앙행정부처 등 순수하게 정치와 행정 기능만을 옮기겠다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무엇보다도 신행정수도건설이 미치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고려할 때 국가의 장래를 위한 필수과제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정책임을 강조했다.

신행정수도건설의 필요성을 설명하는데 이보다 더 명확한 것은 없어 보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따라 다니던 질문 하나가 있었다.

왜 하필이면 충청도인가. 역사학자 토인비는 수도의 입지를 세 가지로 유형화하고 있다.

권위를 표징하는 귄위적 수도입지, 편리성에 입각한 수도입지, 전략적 고려에 의한 수도입지가바로 그것이다.

다른 시각으로 볼 때 수도입지는 자연발생적 수도입지와 새롭게 의도적으로 건설된 수도입지로 양분할 수 있다.

전자가 로마, 아테네, 런던이라면 후자는 브라질리아(브라질), 워싱턴(미국), 캔버라(호주), 앙카라(터키) 등이다.

그밖에 수도는 항구적 수도, 임시적 수도, 입법•사법•행정권 모두를 포괄하는 수도, 3권 중 일부만 가진 분도적 수도(남아프리카, 독일)로 나눌 수도 있다.

이렇듯 수도는 시대와 나라에 따라 또는 성격에 따라 상이하므로 수도입지조건을 일반화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최근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데 크게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국토 중심성과 심리적•정치적 중립성이다.

미국 워싱턴의 경우 인구분포 면에서 13개 주의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공업 중심의 진보적 북부지역과 농업 중심의 보수적 남부지역 간의 정치적 타협에 따른 결정이었다.

호주의 캔버라 역시 인구 중심성과 함께 시드니(뉴사우스 웨일스주)와 멜버른(빅토리아주)의 지역주의적 타협에 의해 결정되었다.

충청권은 남한 국토의 중심지로서 전국에서 접근이 용이하고 영남, 호남의 지역주의가 팽배한 현실에서 비교적 중립적이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행정수도 입지 선정기준에도 충청권이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다.

당시 주요 입지기준은 서울에서 두 시간 거리에,  경부선이 인접하고, 수원확보가 손쉽고, 30분~1시간 안에 중심도시로 이동 가능하고, 우량농지가 적고, 배수가 좋은 구릉지역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지 조건에 적합한 지역으로 공주 장기지구, 논산지구, 천안지구로 압축되었었고, 최종적으로 공주 장기지구가 결정되어 백지계획을 수립하였다. 

2002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도 충청권에 자족기능을 갖춘 신행정수도를 건설하는 안을 마련했다.

그리고 행정수도 건설을 본격 추진하면서 행정수도 충청권 입지의 타당성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연구를 수행하였다.

2003년 10월 21일에는 이와 관련한 공개 세미나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주성제 교수(경희대)는 충청권이 신행정수도 입지의 통상적 기준인 통합성 및 상징성, 중심성, 환경성 및 안전성, 국가균형발전 등 5개 지표 중에서 가장 우수함을 논증하였다.

특히 충청권은 국토의 면적 중심점(충북 옥천군 청성면), 인구 중심점(충북 청원군 가덕면), 신산업 중심점(충북 청원군 남일면)이 모두 위치하는 중심지로 접근성이 우수하여 행정수도의 최적지로 밝혀졌다.

충청권에 행정수도건설이 구체화되자 그동안 잠잠하던 일부 중앙일간지들(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이 일제히 신행정수도건설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3년 11월 초 들어서면서부터 신행정수도 이전 반대론자의 기고와 중앙지의 반대논설이 본격화 되었다.

<신행정수도건설추진백서>(신행정수도건설추진기혁단. 2004. p. 299)에 따르면 2003년 11월 초부터 연말까지 중앙언론에 실린 신행정수도 반대기고 및 사설은 총 32건으로, 찬성론자 기고 8건에 비해 월등하였다.

그리고 서울 및 수도권 시민, 전문가 국민이 양분되에 찬성과 반대의 의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업 초기의 주요 반대논리는 첫째 신행정수도 건설비용 문제였다.

이는 일반 국민에게 가장 쉽게 어필할 수 있는 반대 논리로,  실제 행정수도 건설비용(46조원) 중 정부 재정부담은 일부(11조원)인데 마치 전체 비용을 국민세금으로 충당하는양 "그런 돈으로지방대학 육성하거나 지자체에 나눠주면 또는 다른 성장산업 육성에 활용하면 훨씬 더 큰 지역균형발전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강변하였다.

둘째는 신행정수도건설은 '갑자기 나온 정략적 대선 득표전략'이라는 주장이었다.

비록 행정수도 이전에 명분이 있다 해도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약이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신행정수도건설의 절차적 문제로, 대선과정에서 신행정수도건설을 공약하여 당선되었다고 해도 이는 많은 공약 중 하나로서 국민적 합의가 되었다고 볼 수 없고 행정수도건설은 천도에 해당되므로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된다는 주장이었다.

넷째는 행정수도의 충청권 건설은 결국 충청권의 수도권화를 불러와 다른 지역과의 격차를 심화시킬 뿐이며, 충청지멱 내에서도 행정수도로 인구가 유입되는 블랙홀 현상이 발생할테니 실질적인 지역균형발전에는 큰 효과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다섯째는 남북통일을 고려할 때 행정수도 이전은 바람직하지 않고, 국력 낭비라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여러 반대논리는 앞으로 있을 신행정수도건설의 멀고도 험난한 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가야할 길이라면 부딪혀 나가야 했다.

이 여정은 더 이상 지체하거나 미룰 수 없는 국가적 선택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