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만년 역사 문화도시 세우다

세종시의 옛 터전에는 수천 년 세월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우리는 상상이 아닌 실제 흔적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맨 처음 이곳에 정착한 고대인들인 남긴 유물과 유적을 비롯하여, 이후 여러 왕조가 생성하고 소멸해간 숱한 흔적이 고분•토기•비석•정자•문서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실로 장구한 세월의 나이테라 할 것이다.

세종시건설은 그러한 지역의 역사를 재발굴, 재조명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가옥과 논밭을 걷어낸 땅 맡에서는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땅 위에서는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가던 문화재들이 새삼 역사적 가치를 알리게 되었다.

게다가 유서 깊은 집안의 내력과 지역 주민들의 당대 삶을 증명하는 생활물품도 역사의 일부로 포함되며, 역사공원과 민속박물관을 통해 이 고장의 전통문화 유산으로 보전되었다.

그런가 하면 이 지역의 역사적 사건과 위인들의 이야기는 문화 원형으로 거듭나고 있다.

특히 백제유민의 한이 깃든 비암사, 고려 땅을 지켜낸 연기대첩, 불사이군의 정신을 실천한 임난수 장군, 통렬한 개혁사상을 외친 초려 이유태 선생은 시대를 관통하는 '충절!'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세종시의 자랑스러운 유산이며, 세종시의 정체성을 받쳐주는 정신문화 자산이기도 하다.

세종시는 역사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보전하고 계승하는 문화사업들을 벌여왔다.

세종국립도서관, 대통령기록관, 국립박물관, 아트센터 등의 문화예술 및 행정기관은 그러한 연장선상의 일환이다.

또한 시민들이 참여하는 각종 문화행사와 인문학 강좌도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1. 땅 속의 역사, 부활하다

약 2000년 전 한반도에서 사라진 고대 도시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사학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저 유럽에서 사라진 어느 도시의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서기 79년 8월 24일 배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 화산재에 덮여 통째로땅속으로 땅속에 묻혔던 폼페이는 1592년 우연한 계기로 세사에 알려지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발굴조사가 시작된 것은 18세기부터였고,  과학의 발달에 따른 복원기술 덕분에 오늘날 되살아난 폼페이 도시는 세상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뜨거운 화산재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간 사람들, 화덕 안에서 구워지던 빵, 벽화를 그리던 화공들이 쓰러뜨린 물감통, 수많은 대형 저택들, 대중목욕탕과 원형경기장•••, 시간이 일시에 멈추어버린 듯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폼페이를 조사하고 탐구해온 고고학계의 노력은 '볼거리'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찾아낸 수많은 단서들을 통해서 고대 로마의 종교, 정치, 경제, 사회 생활상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더욱 정밀하고 풍부해졌다.

예컨대 폼페이에서는 마차들로 도로가 혼잡해지는 것을 정리하기 위해 일방통행 시스템을 운영했고, 사치의 상징으로 알려진 대중목욕탕은 신분차별 없는 평등한 공간이었다.

이러한 정보는 모든 유적과 유물 고증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동안 과대 또는 과소평가 되었던 역사인식을 바로 잡아주는 기능을 했다.

 ▲ 세종시 나성동 일원에서 발굴된 백제시대의 구획도시

2010년 10월, 백제시대의 유적으로 확인된 세종시(나성리 유적)에서도 폼페이 발굴을 연상케 하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발굴과정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구덩이가 조사되었는데, 큰비가 내린 다음날 구덩이에 빗물이 고이자 그 용도를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구덩이는 언덕 위의 추락지를 U자형으로 둘러싼 거대한 호수였다.

당시 매장문화재 발굴단장 이홍종 교수는 항공사진과 고지도를 합성한 3차원 영상을 분석한 결과, 당시 금강의 물길을 끌어들여 수로를 정비한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성한 해자(垓子)를 추정케 하는 단서로, 당시의 제사나 집회 등의 문화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또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이 유적의 취락구조였다.

나성리 유적에서는 주택지, 가마터, 저장공간, 제사공간, 광장, 묘역, 빙고, 선착장 등의 도시기반시설이 확인되었을 뿐만아니라 집을 짓기 전에 도로를 먼저 낸 흔적까지 밝혀낼 수 있었다.

이는 도시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설계된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발굴단장 이홍종 교수는 대단위의 유적 규모에 주목하면서 당대의 현황을 이렇게 추정했다.

"나성리 유적은 대단히 넓어서 삼국시대의 구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간 알려진 삼국시대 읍락 형태와는 전혀 다릅니다.

이 도시는 지역 집단들의 연합체로 탄생된 것 같습니다.

한성이나 외부지역과 교류하던 지방 거점지로 보이며, 선착장이나 저장공간 등으로 보아 금강을 중심으로 교류활동이 활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웅진으로 천도하는 시점에 홍수범람이나 고구려의 침략으로 도시가 소멸한 듯합니다.

지방도시의 새로운 구조를 보여주는 큰 성과입니다."

옆 마을인 송원리에서 발굴된 백제 석실고분도 예상치 못한 발견이었다.

원래 이 곳은 문화재 자문위원들이 유물 출토가능성이 가장 낮은 곳으로 보고 첫마을 단지로 추천해준 부지였다.

그러데 아파트 기반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구릉에서 백제시대 상류층의 것으로 보이는 석실고분들이 드러났다.

이 발견으로 공사는 중단되었고, 논의를 거쳐 아파트 건설계획의 일부가 수정되어야 했다.

깎아내기로 했던 구릉을 그대로 살리고 그곳에서 발견된 7기의 석실고분 중 보존가치가 높은 2기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시민들에게 전시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한솔동에 백제고분역사공원이 조성된 배경이다.

2005년 5월, 신행정수도건설 예정지역이 발표된 직후 정부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문화재 조사였다.

재론의 여지가 없었다. 연기•공주지역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을 비릇하여 백제의 기억이 아로새겨져 있는 땅이 아니던가.

뿐인가, 고려 멸망 이후 부안임씨가 정착한 양화리와 진의리, 여양 진씨의 반곡리, 전주 이씨의 당암리 등 유서 깊은 집성촌을 품어온 지역이다.

이미 문화재로 지정된 서원, 정자, 비석 등이 산재해 있는 만큼 땅속에는 얼마나 많은 보물이 묻혔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 세종시민속박물관의 청도기 유물

건설추진단은 문화유산 조사계획을 수립하여 5개면 33개리 50여개 마을의 지상 문화재, 산성, 고분, 유적지 등의 문화재를 전수조사하기로 했다.

우선 고고역사 분야와 인류민속 분야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개발 전역의 모습을 사진과 기록영화로 제작하였다.

그 후 크게 6개 지역단위로 나누어 단계별로 시굴 및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우리나라 도시개발사에서 이러한 다차원적 조사와 보존 조치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개발이냐 보존이냐를 두고 대립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분야의 문화재 전문가들에게 협조를 요청함으로써 유적조사와 발굴작업이 신속히 진행되는 동시에 도시건설작업도 추진될지 수 있었다.

예정지역에서 발굴된 문화재는 선사시대의 것부터 조선시대의 것까지 넓은 시대에 걸쳐 다양한 유형을 선보였다.

선사시대의 것으로는 집터와 석기도구, 무덤,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현재 공공기관이 들어선 대평리 일대에서 4,000평 면적의 논이 발견되었는데, 진흙속 볍씨의 방사성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놀랍게도 3,200년 전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기존에 한반도에서 논농사가 시작된 시기로 알러진 시기보다 500년 정도 앞선 것으로, 이 지역이 '청동기시대 한반도 굴지의 곡창지대'였음을 말해준다.

금강 주변의 둔덕에서는 한반도의 대표적인 거석기념물인 고인돌과 선돌이 확인되었다.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불리는 고인돌은 족장사회 상류층의 무덤이고, 선돌(立石)은 다신과 장수를 기원하는 토속신앙의 상징물이다.

특히 한국은 '고인돌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고인돌이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는데, 북한지여끼지 포함하면 총 3만 기나 된다고한다.

이는 전 세계 고인돌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양이다.

금강주변의 고인돌들은 이 지역의 유구한 역사를 말해주는 증표이다.

                  ▲ 연동면 송용리 고인돌

                   ▲ 금남면 봉기리 고인돌

                    ▲ 금남면 석교리 고인돌

                     ▲ 금남면 국곡리 고인돌

                       ▲ 금남면 국곡리 선돌

                     ▲ 금남면 신촌리 고인돌

                   ▲ 금남면 장재리 고인돌

                     ▲ 부용면 문곡리 선돌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에서는 미래 세대를 위해 이러한 문화재 조사과정을 공개학습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한 예로 연기군 금남면 신촌리에서 문화재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현장에 금남초등학교 5,6학년생 150여명을 초청했다.

학상들이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는 조사현장을 직접 보고 현장에 마련된 모형 주거지에서 유물발견의 과정을 체험함으로써 머리가 아닌 몸으로 문화재 보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계기를 부여했다.

문화재 조사를 통해서 확보된 매장문화재, 지정문화재, 지상문화재 및 문화자료, 샹활가옥 등의 다양한 민속자료는 후일 건립되는 민속박물관 및 역사공원에 비치되어 명품 문화도시 세종시를 빛내게 될 것이다.

세종시의 문화재 발굴조사는 예정지역 바깥의 주변지역으로 범위를 넓혀서 계속되고 있다.

세종시의 탄생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연기•공주의 33개 마을에 기록화 작업도 중요한 과제였다.

우선 작업은 지엑주민들의 삶의 흔적이 담긴 물건들을 보전하는 것으로, 지금은 하찮게 보이는 생활도구지만 훗날에는 이 시대의 생활상을 증명하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건설청에서는 예정지역의 주요 문중(부안임씨, 순흥안씨, 여양진씨, 인천채씨)과 주민들에게 이러한 취지를 알리고, 개인 및 단쳬로부터 생활사적 가치가 있는 물건들을 기증받았다.

그 중에는 부안임씨 문중묘 이장 당시에 출토된다 분청사기 철화표지, 의령남씨 문중의 유물, 남평조씨 문중에서 보관해온 <병자일기>와 영정 등 문화재 가치를 지닌 것도 있고, 초등학교에서 사용하던 풍금, 마을화관 장부, 농기구와 생활도구, 마을표지석 등 잡다해 보이는 물건들도 포함되었다.

일부는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앞으로 건설될 민속박물관에도 전시 보관될 예정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지키는 게 더 어려운 법. 유형의 문화재는 아니지만 보존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예정지역의 옛 지명을 찾아내어 그 유래까지 기록하기로 한 것이다.

2007년 여름, 한창 일손이 귀한 농번기에 이장과 노인회장 등 어르신들의 도움을 받아 현장을 돌아다니며 옛 지명의 유래를 조사했다.

그 결과 우리의 기억에서 잊힐 뻔했던 700여개의 옛 지명들을 책자로 발간되었고, 향후 새 주소사업과 도로명을 정하는데 활용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지역의 뿌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시도로 역사적 전통을 잇는 새로운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