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가 특별한 이유

■ 서울은 만원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한 지 5년이 되었다.

그러나 원래는 행정수도로 구상되었고, 
이 구상은 꽤 오래전에 시작된 것이었다.

발단은 19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난 서울의 과밀화 현상이었다.

당시 서울은 '기회의 땅'이었다.
급속한 산업화 붐이 일면서 서울 인구는 매년 20만 명 이상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런 만큼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렇게 넓은 서울도 삼백팔십 만이 정작 살아보면 여간 좁은 곳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꽉꽉 차 있다.
집은 교외에 자꾸 늘어서지만 연년이 자꾸 모자란다.

일자리는 없고 사람은 입만 까지고 약아지고
당국은 욕사발이나 먹으면 낑낑거리고
신문들은 고래고래 소리나 지른다."

- 1966년 당시의 서울 과밀화를 묘사한 이호설의 장편소설 <서울은 만원이다> 중이서

■ 행정수도가 답이다

세종특별자치시는 세 명의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맨 처음 행정수도 구상은 세상에 내놓은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내가 집권하면 대전을 행정 부수도로 만들어 1단계로 정부 각부의 외청을 옮기고 2단계로 행정부의 일부를 순차적으로 이전시키겠다."

1971년 4월, 제6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김대중 후보의 공약이었다.

대전을 행정 부수도로 하고 대전-경북-강원도를 잇는 횡단고속도로를 건설하여 전국을 반일(半日) 행정 및 반일 생활권으로 묶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행정수도 구상을 구체적인 설계에 옮겼습니다.

"수도의 인구 집중 억제는 여러 정책을 수립해서 강력히 추진하겠지만 결국은 우리가 통일될 때까지 임시 행정수도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1977년 2월, 서울시 연두순시 자리에서 나온 깜짝 발표였다.

발표 당시에는 이미 행정수도 건설에 관한 보고서 '임시 행정수도를 위한 백지계획'이 마련된 상태였다.

3년 동안 391명의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 비밀리에 추진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79년 10•26 사태가 빚어지면서 백지계획은 빛을 볼 수 없었다.

행정수도 구상을 다시 세상에 냏은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한계에 부딪힌 수도권 집중 억제와 낙후된 지역경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건설하겠습니다."

2002년 9월, 대선에 출마하면서 대통령 후보로서 내세운 공약이었다.

그리고 행정수도 이전을 위한 건설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2012년 출범했을 당시에 걸린 문패는 '행정수도'가 아닌 '행정중심복합도시'였다.

10년 세월의 험난했던 풍파를 말해주는 반쪽짜리 행정수도였다.

■ 행정수도 완성의 그날까지

'전국 어디서나 골고루 잘사는 나라'의 초석으로,
세 명의 대통령이 세우고자 했던 도시는 행정수도였다.

따라서 세종시의 최종 목표는 행정수도이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았다.

◆10년간의 갈등 & 소통(국론 통합의 길을 이끈 세종시 건설 논란)

■ 행정수도는 현대판 사민정책

세종대왕이 남긴 어록 중에 '후일지효(後日之效)'라는 말이 있다.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하다'라는 뜻으로
'백년대계(百年大計)'와 일맥상통하는 뜻이다.

세종대왕이 재위 초기에 북방 지역에 펼친 사민(徙民)) 정책 역시 숱한 후일지효의 정책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사민정책이란 여진족의 침략이 잦은 북쪽 국경을 튼튼히 방어하기 위해 4군(四郡)과 6진(六鎭)을 설치하고 남쪽의 백성 1만 5,000명을 이주토록 한 사업으로, 재위 15년째인 1433년 겨울부터 4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세종대왕은 이주를 꺼리는 백성들과 관리들의 반발에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춥고 척박한 땅에 백성들이 정착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소요되었지만 사민정책이 철회되었다면 아마도 오늘날 한반도의 북쪽 경계는 다른 지도를 그렸을 것이다.

■ 진흙 속에서 핀 연꽃

세종특별자치시의 탄생은 현대판 사민정책(徙民政策)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출범하기까지 10년 동안 두 번의 헌법재판소 판결과 네 번의 국회 의결을 거쳐야 했다.

가장 큰 고비는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을 위헌으로 결정했을 때였다.

'수도는 서울'이라는 관습법에 위배된다는 게 위헌의 이유였다.

속도를 내던 신행정수도 건설작업이 중단되었다.

그 후속대책으로 마련된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 역시 선법재판소에 회부되어 위헌 확인을 거쳐야 했다.

2005년 11월 가까스로 합헌 결정을 받아 도시 건설이 재개되었으나, 2009년 세종시를 행정도시가 아닌 교육과학 중심의 경제도시로 바꾸는 수정안(세종시 백지화를 위한)에 의해 좌초될 뻔했다.

결국 수정안특별법이 부결됨으로써 기나긴 줄다리기에 종지부를 찍고, 세종시는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과도 같이 출범하였다

■ 국론 분열에서 통합으로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세종시 건설은 출범 전 10년 동안 국론 분열이라는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수도이전'으로 이해가 갈리는 수도권과 충청권은 대립했고, 그들을 대의하는 정치인들은 건설특별법 제정을 높고 힘겨루기를 했고, 법조계를 비롯한 건축, 행정, 경제, 문화 등 학계에서도 설전을 벌였다.

특히 세종시 예정지역 주민들은 난생처음으로 거리에 나와 머리띠를 두르고 촛불을 들었다.

그러나 세종시 건설은 분열되었던 국론을 통합하는 하나의 장이었다.


◆ 행정도시, 세계의 주목을 받다

■ 외국인들이 세종시를 찾아온 이유

2006년 8월, 일본 공무원과 도시건설 전문가들이 행복도시건설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일본도 언젠가는 한국처럼 수도 기능 이전을 추진해야 하는 만큼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한국의 경험을 배우러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선진국 일본이 한국의 도시건설을 배우러 온 것이다.

여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도쿄는 오래전부터 인구과밀에 시달려온 도시로, 1990년대 초반부터 인구 분산을 위해 수도 이전을 계획하고 세 곳의 후보지까지 선정해놓았으나 반대론자들의 반발에 막혀 잠정 중단되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에서도 세종시 건설 과정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여러 관계자들이 방문했다.

어느 나라든 수도 이전이라는 것은 절차상 극히 복잡하고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세종시는 해외에서도 주목할 만한 모범적 선례를 남겼다.


■ 투명한 입지 선정

세종시를 찾은 해외인사들이 가장 큰 관심을 지닌 분야는 입지 선정, 부동산 투기 방지, 주민 보상 분야였다.

원래 도시 건설의 시작단계가 가장 민감할뿐더러 큰 불협화음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세종시의 경우는 꽤 지혜로운 방식으로 타결되었다.

우선 신행정수도의 입지 조건의 우선순위를 정하기 위해 국민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공정한 입지 선정을 담보하기 위해 전국의 지자체가 추천한 전문평가단이 조사활동을 벌였고 예비 후보지가 충청의 4개 지역으로 좁혀지자 언론을 통해 후보지 명단을 국민에게 하였다.

후보지역들에 부동산 투기가 발생할 수도 있었지만 절차의 투명성과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조치였다.

결과는 아름다웠다.
언론사들은 행정수도로서 적합한지에 관한 분석기사를 제시하여 자연스럽게 국민 여론의 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최종 입지가 연기•공주 지역으로 정해졌을 때 반발 여론은 거의 일어니지 않았다.

선명한 절차에 충실히 따르면 국민적 합의를 얻어낼 수 있다는 귀중한 경험이었다


■ 잡음 없는 보상

제대로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정부가 보상을 강압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을까...

주민들은 이러한 불안과 불신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 정부가 추진해온 재개발 또는 신도시 개발사업에서 그러한 경우가 발생해왔기 때문이다.

세종시의 경우 1년 만에 95퍼센트의 보상이 타결되는 유례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순전히 주민과 정부가 성숙한 자세로 협상에 임한 결과였다.

정부와 주민은 다양한 계층의 전문가로 구성된 보상협의체를 꾸려 합리적인 협상을 도출하기 위해 부단히 논의하였다.

이러한 소통을 거쳐 주민들은 원래 산정했던 공시지가보다 5~10배 높은 기준으로 직접 보상을 받을 수 있었고, 주민생계조합을 통해 재정착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렇듯 불미스러운 마찰 없이 단기간에 보상을 이룬 세종시의 경험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탁월한 도시건설 사례로 전파되고 있다.


◆ 왜 충청도였나
(서울에서 한 시간, 전국에서 두 시간 거리)


■ 지방분권의 요충지

세종시가 충청지역에 자리하게 된 데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국토의 중심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1977년도 도시계획 전문가들이 백지계획을 수립할 때나, 2003년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가 입지 기준을 정할 때나, 후보지는 충북이거나 충남지역이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전국 어디에서도 접근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는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던 발전의 축을 남쪽으로 분산함으로서 명실공히 지방분권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 서울에서 한 시간, 전국에서 두 시간 거리

세종시의 입지적 장점은 전국을 하나로 묶는 교통 요충지로 최적이라는 점이다.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해 논산~천안 고속도로, 대전~당진 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와 연계되어 있을뿐더러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 청주공항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기에 현재 세종시를 중심으로 국토의 공간구조는 새롭게 재편하는 중이다.

수도권 중심의 일극형 교통망 체계를 벗어나 다극형 광역교통망 처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울에서 세종까지 1시간 10분 거리, 전국에서 세종까지 2시간 거리로 단축될 것이다.

또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로 동반성장의 길을 걷고 있는 대전•청주•천안•공주•아산 등지까지 30분 거리로 줄어들었다 것이다.

2030년 인구 80만이 거주하는 행정수도로 자리 매김할 미래를 고려할 때 이러한 교통망 구축은 필수적인 기반이다.

■ 균형발전을 위한 교통망

세종시 신도시 지역은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교통망을 띠고 있다.

도시 구조 자체가 '효율과 집중'보다는 '평등과 분산'의 이념 아래 고리 형태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내부 교통망 역시 탈중심적이고 비위계적이다.

즉 도로를 광로나 대로가 아닌 4차선 이내의 좁은 도로를 체택하고 자동차보다는 대중교통 중심의 통행을 유도했다.

이것은 안전, 친환경, 인간 중심, 교통 약자의 통행권 보장이라는 기본 방향에 따른 교통계획의 일환이었다.

더불어 읍면지역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간선급행버스처계인 BRT를 구축하였다.

원활한 교통망 구축의 차원을 떠나 도시와 농촌의 동반성장을 위한 기초 인프라 기반이라 할 수 있다.


◆ 52퍼센트 녹지율이 상징하는 것

  - 친환경 생태도시를 구현하는 유비쿼터스 기술 -


■ 빌딩이 없는 도심지

세종시 신도시를 둘러보면 다른 신도시와 구별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빌딩숲 대신 탁 트인 공원과 호수, 아름다운 문화 건축물이 있는 도심지 풍경이다.

이러한 독특한 도시 형태는 한국에서 처음 시도한 '도시개념" 국제공모의 결과이다.

'도시개념'이란 도시를 설계하기에 앞서 생활•교통•문화•자연을 통합적으로 아우르는 구상으로, 과감히 도심 한복판을 비워 녹지 중심의 문화공간으로 하였다.

거주지역을 둘러싼 도시 외곽에도 풍성한 자연 생태환경이 펼쳐져 있다.

도심부를 관통하는 금강과 미호천, 병풍처럼 둘러친 전월산과 원수산의 천연 지형을 적극 활용하여 동서남북 어디로든 연결된 둘레길을 조성하였다.

따라서 세종시민들은 어디에 살든 집 밖을 나서면 바로 둘레길을 산책할 수 있다.

■ 신도시 면적의 절반을 녹지로

세종시 신도시의 풍경은 '인간 중심의 친환경 생태도시'라는 건설 비전에 따른 것이다.

녹지 면적을 최대한 확보한다는 기본 방침 아래 도시 설계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공원과 하천 등의 녹지 면적이 신도시 전체 면적의 52퍼션트나 된다.

이는 전국에서 가장 넓은 녹지면적으로, 경기도 분당시의 녹지율 27퍼센트, 동탄시가 24퍼센트인 점을 고려할 때 두 배나 되는 면적이다.

뿐만 아니라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를 최소화하고 자연생태를 보전하기 위해 지역에 자생하는 동•식물 생태조사를 실시하고, 보전 가치가 있는 습지와 하천을 보호하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생활권 곳곳에도 수변공간을 조성했다. 대표적인 공간이 바로 방축천 테마하천공원이다.

풍성한 수변식물이 있고, 자연생태학습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 도시에 '바람길'을 내다

세종시는 자연순환형 녹색도시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지향하는 새로운 도시계획 개념이다.

즉 도시도 생태계의 일부라는 관점에서 도시생활에 요구되는 에너지와 물질을 최대한 재활용 재순환하는 것을 일컫는다.

세종시의 건축, 에너지 교통 등 전 분야에 걸쳐 이러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위를 기울이면 곳곳에서 그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도시 내부의 열기가 잘 빠져나가도록 건물과 건물 사이에 '바람길'을 내고, 공공건축물은 에너지 저감 공법에 따라 짓고, 건물 옥상에는 풀과 나무를 심어 온도 상승을 막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고갈되지 않는 자원을 에너지로 활용하다

세종시는 도시 공해의 주범인 탄소배출을 억제하는 대중교통 체계를 채택하고 있다.

일명 '땅 위의 전철'이라 불리는 BRT(Bus Rapid
Transit) 중심의 대중교통 시스템으로 자동차 이용을 억제하고 있다.

또한 자원순환 차원에서 빗물의 다양한 활용 방안을 마련하였다.

빗물이 땅 밑으로 잘 스며드는 도로 포장재를 사용하고 대형건물이나 아파트에는 빗물 저장시설을  설치하여 재활용하고 있다.

도시에서 배출되는 생활 쓰레기는 '자동크린넷' 시스템으로 자동 수거되어 신재생에너지 생산의 자원으로 재활용하고 있다. 

태양이나 바람과 같이 '고갈되지 않는 자원((renewable resouces)'을 활용한 신재생에너지 발전에도 적극 투자하고 있다.

공공건물과 아파트, 대형상가 등에 설치한 태양광 발전시설을 통해 연 6,500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전기를 생산하고 있으며, 태양열•지열•소형풍력•연로전지 등의 에너지원 주택을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를 이어간다면 202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도입률 15퍼센트, 온실가스 배출량 43.5퍼센트 감축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예도 세종시를 공히 '환경수도'로 만들어줄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실행되거나 개발되고 있다.

이렇듯 세종시는 문명과 자연을 최대한 조화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단숨에 이루어질 수는 없지만 시민과의 소통을 통해 조금씩 개선해나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