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만년 역사 문화도시 세우다

2. 고결한 선조의 정신, 역사공원으로 품어내다

                    전의면 다방리 비암사

● 백제의 마지막 종묘사찰, 비암사에 깃든 사연

1960년, 미술사학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주인공은 동국대 불교학과에 다니던 이재옥 씨였다.

그는 여름방학 동안 오래된 물건에 대해 조사해오라는 과제를 받고 고향인 연기군의 비암사를 찾았다.

비암사에는 기나긴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삼층석탑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석탑을 바라보던 그는 꼭대기에 정체 모를 비석이 얹혀 있는 것을 발견했고, 먹물과 창호지를 들고 석탑 위로 올라가 탁본을 떠서는 지도교수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석탑에 낀 이끼 때문에 비석의 그림은 분간하기 어려웠고, 다시 비암사로 내려가서 탁본을 떠야 했다.

두 번째 탁본을 받아본 지도교수는 비암사로 달려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 그것이 국내에 보고된 바 없는 '불비상(佛碑像)', 즉 불상을 새긴 비석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비암사 삼층석탑 위에는 정교한 솜씨로 부처의 형상이 새겨진 높이 43센티미터 두께 27센티미터의 돌비석 3위가 얹혀 있었다.

그 중 한 비석의 명문(銘文)에는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계유년 4월 10일 (•••) 받들고 염원을 담아 (•••) 등 세 사람을 비롯한 ○○ 50명이 국왕과 대신, 칠세부모(조상), 모든 중생을 위해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짓고 이와 관련한 지식의 인명을 기록한다. 달솔신차, 진무대사 등."

3위의 불비상은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己丑名阿彌陀如來諸佛菩薩石像), 미륵보살가석상(彌勒菩薩半跏石像)이라는 이름으로 각각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었다.

명문(銘文)들을 해석한 미술사학계에 따르면, 이 석탑이 세워진 '계유년'은 백제가 멸망한 지 13년 되는 673년으로, 신라시대 문무왕 13년이다.

그러나 석탑을 세운 '전씨'를 비롯한 50명은 신라에 복속된 백제의 유민으로, 백제멸망 과정에서 저항하거나 부흥운동에 나섰던 백제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을 짓고 석탑을 세운 것이다.

'비암사(碑岩寺)'라는 절 이름은 그러한 유래를 지니고 있다.

이후 일대의 사찰들을 추가 조사한 결과 몇 개의 불비상이 더 발견되었다.

다른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불비상이 이 일대에서만 발견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도 백제가 멸망할 무렵 이 지역의 백제인들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얼마나 극렬히 저항했는지, 또한 망국의 한이 얼마나 컸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세종시에서는 그 뜻을모아 받들어 매년 4월 15일이면 백제의 마지막 종묘사찰인 비암사에서 '백제대제'를 열어, 백제의 역대 왕들과 대신들 그리고 호국영령들의 충혼을 기리고 있다.

그 밖에도 세종시에는 백제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많다.

한성백제의 형식을 그대로 따른 석관묘를 전시하고 있는 한솔동의 백제고분역사공원이 대표적인 공간이다.

                한솔동 백제고분역사공원

● 연기대첩이 '대첩'인 까닭
세종시 옛 터전은 처절한 항전(抗戰)의 땅이기도 하다.

백제의 부흥을 위해 숱한 유민들이 죽어간 지 600여년 뒤인 1291년(고려 충렬왕 17년), 다시 그 땅에서는 커다란 격전이 벌어졌다.

원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던 세력의 잔당인 '합단적(哈丹賊)'이 고려로 쳐들어 온 것이다.

이 반란군은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까지 파죽지세였다.

약탈과 살상은 무자비했다.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고려사>등의 사료는 "사람을 죽여 양식으로 했으며 부녀자들을 윤간한 다음 포를 떴다"고 전한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사위국으로 내정간섭을 받고 있었다.

원 세조의 사위인 고려 세자가 달려가 반란군을 토벌해줄 것을 청했다.

이에 원나라 군사와 고려군이 합세하여, 무섭게 남하하는 합단적의 기세를 연기군에서 저지할 수 있었다.

합단적의 발목을 잡은 공신은 한희유, 김흔, 인후 등이었다.

고려군의 수장인 김흔은 "후퇴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며 강하게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두 명의 부하가 선봉에 선 적의 목을 베는 순간 병사들은 불사항전의 기세로 싸움에 임했다.

합단적은 고려군의 기세에 눌려 퇴각했다가 며칠 후 다시 원수산 방면으로 공격해왔다.

이때 한희유 장군이 적진으로 뛰어들어 창으로 적의 머리를 꿰어 치켜들었다.

사기를 얻은 고려군은 다시 총 공세를 벌여 잔여 세력들을 완전히. 궤멸시켰다.

이 싸움이 바로앞 7대 대첩의 하나로 불리는 '연기대첩'이다.

그러나 살수대첩이나 한산도대첩 등과 같이 널리 알려지지 못한 편이다.

합단적이라는 세력이 원나라군이 아닌 반란 세력이었기에, 즉 공식적인 국가전이 아니섰기에 그 승리의 의미가 퇴색된 면이 있다.

그러나 누란지세의 국난에 처하여 연기군에서 승전하지 못했다면 충청 이남의 삼남지역은 큰 화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연기대첩이 '대첩'인 까닭이다.

격전의 현장인 원수산과 정좌산에는 당시의 항전을 기념하는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정좌산에 전하는 큰창고개, 작은 창고개, 승적골, 군량골, 원수산의 장군바위나 항서바위 등의 명칭은 그곳이 연기대첩의 현장이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연서면 고복자연공원 연기대첩비

세종시 연서면 고복자연시립공원 안에는 당시의 치열한 전투를 기리는 연기대첩비와 비문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는 매년 10월, 고려를 지킨이들을 기리는 기념행사를 통해 세종시 지역에 면면히 흐르는 호국정신을 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 세종시가 이어받은 부안임씨 가문의 충절정신

세종시 건설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은 누구일까?

아무래도 대대로 뿌리내리고 살아온 터전을 내준 주민들이 아닐까 싶다.

그 중에서도 부안임씨 가문이 가장 큰 희생을 감수했다.

700년 세월에 걸쳐 대대로 진의리, 양화리, 나성리 등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오면서 2만여 기에 달하는 선조의 묘가 봉안되어 있는 고향을 잃는다는 것은 멸문지화(滅門之禍)와 다름없는 충격이었을 터, 수도 이전을 반대하기도 했고 민속마을이라는 방식으로 마을을 지키려고도 했으나, 시대 변화의 큰 물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고려 말의 충신 임난수(林蘭秀, 1342~1407) 장군을 입향(入鄕) 시조로 하는 이 가문에는 '충절'의 기상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임난수 장군은 조선이 건국되자 하늘 아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마지막 벼슬인 공조전서(工曹典書, 오늘날의 건설교통부장관)를 내려놓고 양화리로 낙향한 것이다.

무관으로서의 용맹한 기상을 말해주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32세 때인 1374년, 최영 장군과 함께 탐라를 정벌할 때 임난수 장군이 적의 칼에 잘린 자신의 오른팔을 화살통에 집어놓고 계속 싸웠다는 전설같은 일화다.

임난수 장군이 생을 마감한 지 10여년이 지난 뒤인 1419년, 세종은 임난수의 사당에 '임씨가묘(林氏家廟)'라는 친필 편액을 내리고, 불천지위(不遷之位, 영원히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나라가 허락한 공신의 신위)로 받들도록 하였으며 연기군 일대에 땅을 하사했다.

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전 왕조에 절개를 지킨 인물이었지만 세종은 "시기를 도울 만한 기략을 운영하고 세상을 덮을 만한 공훈을 세웠다"며 치하의 글을 내렸다.

            연기면 세종리 숭모각 및 은행나무

현재 세종리(구 나성동)에 건립된 '숭모각(崇慕閣)'이 바로 임난수 장군의 사당이다.

숭모각 앞에는 600년 세월을 한결같이 지키고 있는 암수 한 쌍의 은행나무가 있다.

임난수 장군이 마을에 들어와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진 이 노거수(老巨樹)는 제 주인의 기운을 이어받은 듯, 나라에 큰 변이 생길 때마다 소리를 내어 알렸다는 영험한 일화를 전한다.

한일합방과 6•26전쟁 때 그러했고,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베어트리파크는 없애려 했을 때도 신비한 소리를 내어 화를 면했다고 한다.

현재 세종시는 전통문화유산을 지키는 뜻에서 유서 깊은 숭모각과 은행나무를 역사공원으로 조성하고 있다.

부전자전이라 했던가. 임난수의 아들 임목 역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을 택했다.

조선 태종 때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며 양양도호 부사를 지낸 관료였으나 세종 무렵 세속을 벗어나 은거의 삶을 살았다.

임목은 서해바다로 굽이굽이 흐르는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자락에 부친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독락정(獨樂亭)'이라는 이름의 정자를 들였다.

이곳 역시 역사공원으로 조성 중이다.

● "국가를 다시 반석 위에" 2만 자 상소문에 얽힌 일화

                        초려 이유태 신도비

"아! 의리(義理)는 사람에게 있어서 끝내 없어지지 않습니다.

의(義)로 마음을 제어하면 마음이 어찌 바르지 않겠으며, 의로 사람을 제어하면 누군이들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무릇 백성은 편안한 도(道)로 부리면 비록 괴롭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며, 살리려는 도(道)를 죽이면 비록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재물은 의로 쓰면 비록 천금이라도 아깝지 잃으나, 말도 안 되는 곳에 낭비한다면 비록 터럭만큼이라도 아까운 것입니다.

이것이 전하께서 마음을 세우는 바른 도리요, 오늘날 위정(爲政)의 요법입니다.

(•••) 예전에 일찍이 이이(李珥)가 <성학집요(聖學輯要)>라는 한 권의 책을 지어 선조대왕께 바친 바 있는데, 제왕의 학문과 통치의 도구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신이 삼가 그 가운데 나아가 수기(修己)에 절요한 학설을 대략 뽑아서 전하를 위해 다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전하께서는 마음을 비우고 뜻을 겸손하게 하시에 번거로움과 수고로움을 싫어하지 마시고, 깊고 밝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역주 기해봉사(己亥封事)> 중에서)

이 글은 1659년 효종에게 올린 2만 자 분량의 방대한 상소문이다.

상소문의 주인공은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1607~1684)였다.

초려는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윤선거와 더불어 충청 5현으로 일컬어지는 유학자로, 당대 경기•충청지방을 대표하는 실학자이자 경세사상가였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젊은 시절 청나라에서 볼모로 지내야 했던 효종은 북벌을 주장하는 개혁적 성향의 군주였다.

장문의 절절한 상소문은 연산군의 폭정과 임진•병자 양난으로 인해 피폐한 국가를 재건하자는 취지에서 군주에게 올린 것이다.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의 개혁 정책은 실천되지 못했지만, "풍속을 바로잡고 인재를 양성하고 낡은 폐단을 혁파해야 부국강병하다"고 외친 초려의 개혁의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귓가에도 쩌렁쩌렁하다.

                          초려역사공원

초려역사공원에 가면 조선 유학자의 서릿발 같은 정신과 사상을 만날 수 있다.

● 조선 왕들의 친필을 만나다

왕조시대에 왕의 교지(敎旨)를 하사받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관직이나 토지 등을 내리는 표창장 같은 것이니, 당연히 가문의 영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왕이 직접 붓을 들어 쓴 교지라면? 대대로 전하는 가보(家寶)쯤 되지 않을까?

연기군 신천 강씨 문중이 바로 그러한 경우다.

1744년(영조 20년) 12월 24일, 영조대왕은 상산 부원군(商山府院君) 강순용의 후손 강치경이 바친 문서를 받았다.

그것은 태조의 친필 교지였고 '조선왕보(朝鮮王寶)'라는 국새 인장이 찍혀 있다.

"조선왕조에서 임금이 관원을 임명하는 문서를 직접 쓴 일이 있는가?"

기이하게 여긴 영조대왕은 <태조실록>을 열람하여 그 사실을 확인했다.

태조의 친필 교지를 받은 강순용은 태조의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의 오라비였다.

강순용의 집안에는 태조의 어서(御書)를 소중히 간직해 오다가, 후손인 강치경이 영조대왕에게 이를 바친 것이다.

                    연기면 고정리 어서각

350년 동안 보관되어온 창건 시조의 친필을 받아본 영조대왕은 감회가 깊었다.

이에 감사의 뜻으로 신덕왕후의 고향인 연기군 고정리에 어서각(御書閣)을 건립하여 태조의 교지를 잘 보관하라며 친필 교지를 내렸다.

그 후 정조대왕도 이곳에 비각을 세우라는 교지를 내렸고, 훗날 이 사적을 본 고종황제 역시 교지를 하사했다.

그리하여 이 어서각은 역대 조선 4대 왕이 하사한 교지를 보장하게 되었다.

이는 다른지역의 어서각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경우로, 현재 원본은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는 유명한 '버들잎' 러브스토리'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 창건 이전의 일로, 이성계 장군이 우물에서 강씨에게 물 한 잔을 청하자 강씨 여인은 표주박 안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물을 건넸다.

그녀의 지혜로운 배려에 감탄한 이성계는 강씨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 '충효'의 정신이 숨 쉬는 고장

세종시 역사공원은 도시개발에 따라 이전되는 지상문화재를 보존 활용하고, 현지에 보존되는 유적과 유물의 역사적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설계되었다.

굳이 '공원'의 형식을 취한 것은 시민들에게 휴식과 교육의 공간까지 제공하기 위해서다.

현재는 어서각•백제고분•초려 역사공원이 완공되어 있으며, 이후 독락정•은행나무•합호서원•구을달 역사공원까지 총 7개가 들어설 예정이다.

역사공원으로 조성되지는 않았지만 선조들의 숨결이 깃든 역사적 현장도 많다.

장군면에는 세종대왕의 충신이자 '백두산 호랑이'로 알려진 김종서 장군의 묘가 있다.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면 충신을 정려(旌閭)하여 영조시대에 세워진 비각이 있다.

금남면의 달전리에는 사육신 가운데 한 명인 성삼문의 위패를 모신 사당 문절사가 있다.

매죽헌 성삼문은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훗날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회유를 거절하고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순절한 충신이다.

성삼문의 고향은 충남 홍성이며, 벼슬살이를 하던 곳은 서울 종로였다.

그런데 어떻게 연고도 없는 금남면 달전리에 사당이 세워졌을까?

매죽헌이 참살을 당한 이후 그의 위패는 외손자인 무안 박씨 가문에서 모셔왔으나 구한말에 본가인 창령 성씨 문중으로 넘겨졌고, 문중의 집성촌이 있는 달전리로 이전되면서 사당이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달전리에는 또 하나의 사당이다 있다. 바로 구한말의 유학자이자 항일인사인 덕천(德泉) 성기운(1877~1956)을 기리는 병산사(屛山祠)이다.

성기운 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로 민적부(제적등본)를 시행한 민적령에 저항하고, 조세와 부역 동원 등의 정책에 반대하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모진 고문을 견뎌내고 출옥한 뒤에도 자신의 국적을 써넣어야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대한 유민(流民)'이라 적을 정도로 지조가 깊었다.

그는 선조의 고향인 달전리로 내려와 제자를 양성했고, 그 제자들이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문집을 보관하기 위해 오늘날의 사우(祠宇) 병산사를 지었다.

충청지역은 예학(禮學)의 고장으로서 효자, 효부, 열녀를 기리는 곳이 많다.

특히 연서면 기룡리의 효교비(孝橋碑)는 5대에 걸쳐 7명의 효자를 배출한 남양 홍씨 가문을 정려하여 1773년(영조 49년)에 세워졌다.

조선시대는 효(孝) 사상을 국가 최고의 가치이념으로 숭상하여, 효성이 지극한 이에게는 큰 벼슬을 내리곤 했다.

영조대왕은 조상을 극진히 섬기는 신하 홍상직의 효심에 감동하여, 그의 고향을 효교동(孝橋洞)이라 고쳐 부르게 하기도 했다.

                         금남면 병산사

                      연서면 기룡리 효교비

이와 같이 세종시는 유독 충(忠)과 효(孝) 사상이 뿌리 깊은 곳으로, 절개와 지조를 지킨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행정도시로 새롭게 태어난 세종시는 그러한 지역적 전통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일까?

결코 무관치는 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