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의리(義理)는 사람에게 있어서 끝내 없어지지 않습니다.
의(義)로 마음을 제어하면 마음이 어찌 바르지 않겠으며, 의로 사람을 제어하면 누군이들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무릇 백성은 편안한 도(道)로 부리면 비록 괴롭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며, 살리려는 도(道)를 죽이면 비록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재물은 의로 쓰면 비록 천금이라도 아깝지 잃으나, 말도 안 되는 곳에 낭비한다면 비록 터럭만큼이라도 아까운 것입니다.
이것이 전하께서 마음을 세우는 바른 도리요, 오늘날 위정(爲政)의 요법입니다.
(•••) 예전에 일찍이 이이(李珥)가 <성학집요(聖學輯要)>라는 한 권의 책을 지어 선조대왕께 바친 바 있는데, 제왕의 학문과 통치의 도구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신이 삼가 그 가운데 나아가 수기(修己)에 절요한 학설을 대략 뽑아서 전하를 위해 다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전하께서는 마음을 비우고 뜻을 겸손하게 하시에 번거로움과 수고로움을 싫어하지 마시고, 깊고 밝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역주 기해봉사(己亥封事)> 중에서)
이 글은 1659년 효종에게 올린 2만 자 분량의 방대한 상소문이다.
상소문의 주인공은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1607~1684)였다.
초려는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윤선거와 더불어 충청 5현으로 일컬어지는 유학자로, 당대 경기•충청지방을 대표하는 실학자이자 경세사상가였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젊은 시절 청나라에서 볼모로 지내야 했던 효종은 북벌을 주장하는 개혁적 성향의 군주였다.
장문의 절절한 상소문은 연산군의 폭정과 임진•병자 양난으로 인해 피폐한 국가를 재건하자는 취지에서 군주에게 올린 것이다.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의 개혁 정책은 실천되지 못했지만, "풍속을 바로잡고 인재를 양성하고 낡은 폐단을 혁파해야 부국강병하다"고 외친 초려의 개혁의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귓가에도 쩌렁쩌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