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국민에 국민을 위한

5. 주민 참여형 보상의 선례를 남기다

2003년 참여정부의 출범과 함께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가 구성되자 서울과 수도권은 거세게 저항했다.

대한민국에 두 개의 '서울'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서울시의회는 수도 이전을 반대하는 규탄대회를 벌였고, 이명박 서울시장은 어느 자리에서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수도 이전을 막고 싶다"고 발언했다.

신향정수도 후보지로 선정된 충청지역 주민들은 대체로 환영하는 입장이었으나, 전통적 보수 성향의 일부 주민들은 의혹과 불신을 거두지 않았다.

수도 이전을 반대하는 일부 정치세력은 이들과 접촉하여 반대 시위를 추동하기도 했다.

그 결과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이 헌법재판소에 회부되었을 때, 부안임씨 종친회를 비롯한 연기군 주민과 공주시 주민 224명은 그들 편에 서서 헌법 소원에 참여하였다.

이때부터 예정지역 주민들 사이에 갈등과 반목이 빚어졌다.

마을 분위기는 냉랭해졌고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이 마련되어 본격적으로 주민보상대책이 시작되자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짜장면을 시키잖아요? 그러면 길목에서 짜장면 가져온 배달 오토바이를 돌려 보내버려요.

누구네 집으로 가냐고 물어서 (세종시건설) 찬성하는 집이면 그 집에 아무도 없다고 내쫓는 거죠.

이웃에 초상이 나도 문상을 안가요, 다른 건 몰라도 시골에 살면서 경조사 왕래를 안 한다는 건 인연 끊겠다는 거죠.

그때 인심이 흉흉했어요. 도시 사람들은 이사를 자주 다니니까 이웃도 모르고 살지만 우리는 한동네에서 계속 살아왔기 때문에 서로 친척이거나 선후배거나 그런 사이거든요.

그런데도 그 정도였으니•••.
그게 정치적인 이유라기보다는 보상 문제가 더 컸어요.

한푼이라도 더 보상을 많이 받으려다 보니 세종시건설에 반대하고 나선거죠."

2005년 12월부터 한국토지공사가 보상 및 이주대책에 나서자 반대파 주민들은 협상에 대해 어깃장을 놓았다.

마을 현지조사를 나온 공무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거나 가스통을 싣고 토지공사 사무실로 찾아가 위협하기도 했다.

사실 찬성파든 반대파든 주민 개개인에게 세종시 건설은 인생의 커다란 모험이었다.

땅을 내주면 어디로 가야 하나, 주변 땅값이 오르면 대체농지를 못 구하지 않을까, 전업을 해야 하나, 기술도 재주도 없이 창업했다가 망하지 않을까, 제대로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더욱이 보상 과정에서 정부가 강압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

지금까지 정부가 추진해온 재개발 또는 신도시 개발사업에서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가 얼마나 많았던가.

판교 신도시 개발사업이나 오산 세교지구 개발사업의 경우만 해도 망루를 설치하고 저항하던 주민들이 경찰과 충돌하여 죽거나 다치는 일이 있었다.

다행히 우려하던 마찰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1년 만에 95퍼센트의 보상이 타결되는 이례 없는 성과를 거두었다.

기본적으로 주민들은 넉넉한 토지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한국토지개발공사 측에서 주민과의 잡음을 피하기 위해 보상 가격에 대한 객관적인 산정 기준을 적용하기도 했지만, 신행정수도 위헌 소송으로 1년 동안 발목이 잡혀 있는 동안 땅값이 껑충 뛰었기 때문이다.

원래 산정 기준이었던 2004년 8월 당시의 공시지가에 비해 5~10배 높은 기준으로 책정될 수 있었다.

직접적인 보상뿐만 아니라 이주자들의 생활조건에 관한 간접적인 보상 문제도 비교적 원만하게 타결되었다.

주민 보상이 큰 마찰을 빚지 않고 단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주민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는 단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블야별 대책위원회들이 우후죽순 생겨나 저마다 목청을 높이는 바람에 협상이 순조롭지 않았다.

그러자 주민들은 자정 노력을 발휘했다. 자발적으로 4개면 주민 100명당 1명씩 대의원을 뽑아 100여 명으로 구성된 주민보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정부와 협상하기로 한 것이다.

1만여 주민들의 70퍼센트가 가입한 단체였던 만큼 주민보상대책위원회는 대표성을 지니고 정부와 협상 테이블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다만 대의원들은 일반인이었기에 자체적으로 변호사, 세무사 등의 보상 전문가들을 섭외하여 보상법을 공부하고 전국의 보상 사례들을 수집하는 한편,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모두 조사하여 협상할 안건들을 꼼꼼히 정리하고 복잡한 과정을 주민들에게 설명하는 일을 해나갔다.

합리적인 도출을 위해 보상협의체가 꾸려지기도 했다. 토지공사, 건설교통부, 공주시, 연기군, 충청남도, 행복도시추진단, 감정원, 변호사, 교수, 지역대표로 구성된 보상협의체는 보상이 일방적으로 처리되지 않도록 하는 완충장치로, 이제까지 국내에서 한 번도 시도된 바 없는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간의 간극을 좁히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토지, 주택, 가축 등의 직접적인 보상 외에도 이주자들의 주거지 공급이나 생계대책 마련 등의 간접 보상문제, 분묘를 이장하는 방안 등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주민대책위원회는 영세한 세입자와 같이 보상 조건에서 배제되어 있는 대상자들에 대한 보상문제를 놓고 정부 측과 열띤 설전을 벌이기도 했고, 타 지역으로 이주했을 때 가축을 키울 수 없는 축산업자들을 위한 폐업보상문제로 격돌하기도 했다.

보상금을 예치할 경우 행복도시 내 상가용지 입찰의 우선권을 부여하는 등 주민들이 세종시에 재정착할 수 있는 여러 방안들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 예로, 주민이 자신이 선호하는 주거지 형태를 직접 선택하는 방안을 통과시켰고, 원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주택조합을 만들어 한솔동에 1,000세대 규모의 행복아파트를 짓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 덕분에 원주민의 약 40퍼센트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재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주민들 중에는 보상을 제대로 받아놓고 손해를 본 경우도 없지 않았다.

보상대책위원들은 미리 타지에서 온 부동산 투기업자들의 꾐에 넘어가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해 두었지만,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 일부 주민들은 헐값에 '딱지'를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보상대책위원들을 헐뜯던 원천반대위원회 주민들 중에는 협상을 거부하다가 낭패를 본 경우도 있었다.

보상 기한 지나서 소송을 걸었다가 패소하여, 보상은커녕 소송비만 날리고 이웃들과도 척을 지게 된 것이다.

"당시 볼일을 보러 조치원에 갔는데, 마을 어르신들이 나를 부르더니 분양권 세 장을 2,500만원에 사라고 하대요.

마음 같아선 얼른 사고 싶었지만, 명색이 보상대책위원장인 내가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팔지 마시라, 내가 책임진다, 가만히 갖고 계시면 나중에 한 장에 7,000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 어르신들께 설명하고 돌아왔죠.

최근에 우연히 그분들을 거리에서 만났는데, 한턱을 쏘겠다고 하시대요. 왜 밥을 사주시냐고 했더니, 그때 분양권 팔지 말라고 해서 갖고 있었더니 프리미엄이 붙어서 최근에 2억 5,000만원 받고 팔았다는 거예요.

그때를 생각하면 주민들이 많이 조급했다는 게 가슴이 아파요. 정부에 대한 오랜 불신 때문이겠죠. 최대한 보상을 끌어내려고 노력했던 대책위원들도 꽤 욕을 먹었어요.

우린 무보수로 봉사했는데 토지공사에서 뒷돈 몇 억을 받아먹었다느니, 마을을 팔아먹는다느니 하는 비난을 받을 때는 참 속상하더라구요."

당시 3년간 주민 보상을 책임졌던 임백수 보상대책위원장의 후일담이다.

그를 비롯한 100여명의 보상대책위원들과 청년들은 순수하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나섰던지라 동네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때면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는 든든한 배후자가 있었다. 다름 아닌 동네 어르신들이었다.

"힘들지? 힘내!"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동네 어르신들의 그 한마디에 보상대책위원들은 다시 힘을 내어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보상대책위원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성과 중의 하나는 특별법의 일부를 개정하여 주민들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세종시 개발사업에 참여하여 생계활동을 할 수 있도록 주민생계조합을 만든 것이다.

조합에서는 2006년 3월부터 비영리법인 '장남', '전월', '영농사업단'을 조직하여 2,800세대 조합 주민들에게 철거, 벌채, 조경수목 이식, 무연고 분묘 이장, 방치된 폐공 복구작업, 경비 위생용역, 영농임대 등의 일자리를 지금까지 제공해오고 있다.

2008년부터는 큰 액수는 아니지만 창출 이익의 25퍼센트를 조합원들에게 배당하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의 개발사업에서 주민이 보상과정에 직접 참여한 경우는 없었다.

말이 좋아 협상이지, 정부가 일방적으로 보상내용을 결정하고 주민은 이에 반발하는 형국이었다.

주민보상대책위원회와 주민생계조합은 주민이 세종시건설이라는 국책사업에 동참한 매우 특이한 경우로, 이후 개발지에서 모범적인 벤치마킹을 하는 선례가 되었다.

철거 규모를 고려할 때 주민 보상이 1년 만에 95퍼센트 이상 이루어졌다는 건 대단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충남 연기군, 공주군(2개 시군, 5개면 33개리)에 거주하는 4,180가구(1만여명), 가옥 3,598동, 공장 154개, 축사와 과수원 등의 농장이 모두 철거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주민보상에 몇 년이 소요될지 기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주민 참여형의 합리적인 보상이 가능했던 근본적인 배후에 노무현 대통령이 있었다.

2006년대 당시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이었던 이춘희 세종시장의 증언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은 사업 초기부터 주민보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보상이 원활히 이루어져야 사업도 제대로 추진할 수 있으니 주민들이 슬퍼하는 일이 없도록, 단순히 법 규정에 얽매이지 말고 주민들의 생계대책까지 배려하라고 여러 차례 지시했다는 것이다.

행정수반의 그러한 특별 당부가 있었기에 주민이 참여하는 보상과정도 가능할 수 있었고 그 결과도 원만했다.

이와 같이 세종시를 지켜내는 과정에서 주민들은 많은 시련을 겪었다.

주민끼리 분열하고 반목했고, 상처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법. 주민들은 단결의 힘을 배웠고,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