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북방으로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따뜻하고 물자가 풍부한 남쪽 고향을 버리고 한지(寒地)를 자청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에 세종대왕은 사민을 모집하기 위해 양반에게는 자품(資品)을 높여주거나 토관직을 주고, 향리나 천인에게는 부역을 면제하거나 면천(免踐)으로써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호응이 없자 죄인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방안까지 동원하기도 하다.
세종시 건설이 현대판 사민정책이라 할지라도 이주 보상에 관한 해겳방식은 세종대왕보다 훌륭했다 자부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예정지역 중인들에 대한 보상직업과 재정착 지원이다.
주민에 대한 강제이주나 철거는 없었으며, 울며 겨자 먹기식의 일방적인 보상도 없었다.
그보다는 주민과 소통하고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보상방식을 택했다.
토지 보상은 공시지가보다 몇 배 높은 액수로 보상했고, 영세한 주민들이 거주할 저렴한 임대아파트 공급 대책을 세웠고, 재정착을 원하는 주민들의 생계대책으로 다양한 일자리 방안들도 마련했다.
주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민대표와 함께 논의하고 협상한 결과, 1년 만에 95퍼센트의 보상이 타결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주민보상에 관해 특기할 만한 또 다른 사업이 있었다.
연기•공주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는 3만 2,000여 기의 묘지를 이장하는 문제였다.
절차상 도시를 건설하려면 묘지부터 이전해야 했기 때문에 건설청은 일찌감치 장사 대책팀을 꾸려 적극적인 방안 마련에 착수했다.
가장 좋은 방안은 화장장과 납골장을 갖춘 장묘시설을 갖추어 이장하는 것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장례문화를 바꿀 기회이기도 했다.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악지대인 우리의 국토 상황을 고려할 때 매장(埋葬) 풍습은 개발에 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장사 대책팀은 대대로 모셔온 선조들의 묘를 파내어 화장하기를 꺼리는 지역 종중을 설득하는 한편 풍수지리에 맞는 묘지공원 자리를 물색했다.
애초에는 서양처럼 도시 내부에 정갈한 공원묘지를 조성할 계획이었으나, 집 근처에 화장시설이 들어오는 것을 꺼리는 주민 감정을 배려하여 한적하고 조용한 남면 고정리 지역에 입지를 정했다.
시민들이 공원묘지에 거부감을 갖지 않도록 하는 데도 정성을 기울였다.
36만 제곱미터의 넓은 부지에 무공해 최첨단 설비를 갖춘 화장장과 납골 시설을 들이고, 자연친화적인 자연장(수목장, 납골평장 잔디묘역), 지역 종중의 묘역,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수목 공간도 조성했다.